항목 ID | GC076006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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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鍾胄 |
영어공식명칭 | Kim Jong-ju |
영어음역 | Kim Jong-ju |
영어공식명칭 | Kim Jong-ju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재성 |
출생 시기/일시 | 1864년 - 김종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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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김종주 3.1운동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3일 - 김종주 투옥 |
몰년 시기/일시 | 1947년 - 김종주 사망 |
출생지 | 김종주 출생지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하송리 |
거주|이주지 | 김종주 거주지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하송리 |
활동지 | 김종주 활동지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순천 출신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종주(金鍾胄)[1864~1947]의 고향은 현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하송리이다. 순천 지역 유림 출신으로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임병찬(林炳瓚)[1851~1916]이 조직한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에서 1914년 김승제(金承濟)·배영주(裵泳柱)·서인석(徐仁錫)·김영배(金永培) 등과 함께 낙안군 대표로 활동했다.
김종주는 1919년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일반인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유흥주(劉興柱)[1870~1952]와 함께 1919년 4월 13일 낙안읍성 시위를 주도했다. 김종주와 유흥주는 1919년 4월 13일 각자 자택에서 태극기를 장만하고 ‘조선독립기’, ‘대한독립기’라고 써넣은 후 낙안읍성 서문 밖에 들고 가서 박태문(朴太文)·배윤주(裵潤柱)·배형주(裵炯柱)[1885~1946]·김선제(金善濟)[김종주의 아들] 등에게 독립운동의 취지를 설명하였다. 또한, “우리 동지들은 오늘이 때마침 낙안읍 장날이므로 이를 기회로 하여 장터로 나아가 독립 만세를 외쳐, 우리 동포가 함께 일어나도록 하여 잃었던 국권을 되찾자.”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1919년 4월 13일 오후 2시 무렵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낙안읍성 문 안으로 행진했다. 일본군이 제지하려 하자 김종주는 “총검으로 찔러 죽일 테면 죽여 보아라.”라고 말하면서 가슴을 제쳐 보이고 일본군 헌병 상등병의 권총과 칼을 연달아 빼앗으려 덤벼들어 양손을 다쳤다. 이때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재판에서 징역 1년 6월에 처해졌다.
[상훈과 추모]
김종주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