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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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幹會蔚珍支會 |
영어의미역 | Uljin Branch of New Trunk Associ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장희흥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 있었던 신간회 소속 지회.
[개설]
1920년대 부르주아민족주의 계열의 문화 운동 침체와 타협적 사회주의자들의 자치론이 대두되면서 국내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의 일환으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모여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었다. 이에 따라 울진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 143곳에 지회(支會)가 설립되었다.
[설립목적]
신간회의 강령인 민족단결과 민족의 정치·경제적 각성을 기본 이념으로 울진 지역의 전반적 사회 개선을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서울기독교청년회관에서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대회가 개최된 이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내 선일약국에서 1927년 10월 신간회 울진지회 발기총회(發起總會)가 열렸다. 창립준비위원으로 이우영(李愚榮), 주진복(周鎭福), 장인환(張仁煥), 김병호(金炳虎), 남정호(南廷鎬), 윤호규(尹鎬逵), 조헌석(趙憲錫) 등을, 규약기초위원(規約基礎委員)에 이우영, 윤호규, 조헌석, 주진복, 남계원(南啓源) 등이 임명되었다.
창립발기준비위원 대부분은 3·1운동에 참여하였거나 울진청년회를 통해 사회 운동을 했던 인물들이었다. 두 달여간의 준비 끝에 1927년 12월 23일 선일약국에서 창립발기대회가 개최되고 신간회 울진지회가 출범하였다.
신간회 중앙에서 파견 나온 홍기문(洪起文)이 조직을 담당하여 회장에 황만영(黃萬英)을 선출하고, 장식(張植), 주우영(朱愚營), 황탁용(黃鐸龍), 남왈성(南曰星), 주병복(朱炳福), 전광표(田光俵), 전병창(田炳昌), 주진복, 김병호 등을 간부로 임명하였다. 설립 이후 신간회 울진지회는 사회 운동과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지역의 명망가와 연대하여 활동하였다.
신간회 울진지회는 1929년에 들어와 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은 이를 탄압하였고, 1929년 초에 신간회 울진지회의 간부들이 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만으로 체포·투옥되었다. 투옥된 간부 중 총무간사 김병호는 법정 투쟁을 벌여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일제 경찰은 모든 형태의 집회를 금지하는 탄압을 가하였다. 신간회 울진지회는 총회 개최가 일제의 집회 금지로 열리지 못하게 되자 1929년 3월 16일에 임시의장 한후석(韓候錫)의 사회로 동명유치원(東明幼稚園)에서 임시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총회에서 대폭적인 임원 교체가 이루어져 회장에 장인환(張仁煥), 부회장에 한후석(韓候錫)이 선출되었다.
또한, 서무부 총무간사에 이우영, 서무부 상무간사에 이중엽(李仲燁), 서무부 간사에 진경문(陳慶文), 재정부 총무간사에 윤호규, 재정부 상무간사에 주진복, 재무부 간사에 남월성, 정치문화부 총무간사에 김용운(金龍雲), 정치문화부 상무간사에 김계동(金啓東), 선전조직부 총무간사에 최중모(崔仲模), 선전조직부 상무간사에 윤홍중(尹弘重), 조사연구부 총무간사에 최대열(崔大烈), 조사연구부 상무간사에 장재환(張在煥)이 임명되었다.
이후 꾸준한 활동을 펼치다가 1930년에 들어 점차 역량이 축소되어 갔다. 이는 1928년 말 조선공산당이 해체되고 이후 사회주의 진영의 운동 노선 변화로 인해 신간회 운동이 약화된 것과 관계가 있다. 결국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의 존속을 강조하는 세력과 신간회를 해체해야 한다는 세력과의 마찰 속에 신간회는 1931년에 해체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간회 울진지회도 지역 차원에서의 민족협동전선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활동사항]
신간회 울진지회는 설립 이후 지역의 명망가 및 울진청년회와 연대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울진 지역은 농촌 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작 농민들을 위한 소작 관계 개선 투쟁 등을 벌여 소작 농민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하려 하였다. 장식, 주진복 등은 청송군 일대에 이상적 농촌을 건설하려 하였다. 교육 활동으로 울진군 전역에 야학회, 독서회를 만들고 순회문고 설치를 추진하는 등 문맹 퇴치와 의식 구조 개선에 노력하였다. 이밖에도 사이비 종교 단체 박멸을 결의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된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지역 좌우 합작 단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후 1930년대 울진공작당이나 적색농민조합으로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