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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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拓民 |
영어의미역 | Frontiersma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1883년 울릉도 개척령에 의해 본토로부터 울릉도에 이주해온 사람들.
[개설]
1883년(고종 20)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진 후 수토(搜討) 정책이 폐기되고, 울릉도에 개척민이 이주했으며, 일본인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소환되었다.
[관련기록]
1883년 울릉도 개척령에 의해 울릉도에 들어와 정착과 개간을 시작한 민호와 인구 상황에 관한 자료인 『광서구년칠월 일 강원도울릉도 신입민호인구 성명연세급전토기간 수효성책(光緖九年七月 日 江原道鬱陵島 新入民戶人口 姓名年歲及田土起墾 數爻成冊)』에 의하면, 16호 54명이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진 후 울릉도에 이주해 들어온 것으로 나온다. 이들은 대황토포[태하]·곡포[남양]·추봉[송곳산]·현포동 등지를 개간하여 정착하였다. 1883년의 신입 민호에 실린 16호 54명의 뒷날 행적을 전하는 자료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또 우용정(禹用鼎)의 『울도기(鬱島記)』에는 “관동 사람 7, 8집이 먼저 들어오고 영남 사람 10여 집이 따라 들어와서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불을 놓아 밭을 일구었다. 이로부터 팔도의 사람이 조금씩 옮겨와서 점차 촌락을 이루었으나 쥐의 피해가 혹심하여 밭곡식이 남아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울릉도 거주민의 변천]
1893년에 울릉도의 호수는 200여 호였다. 1896년 9월, 울릉도 도감(島監) 배계주(裵季周)의 보고에 의하면, 도내 동리수는 11동[저포동·도동·사동·장흥동·남양동·현포동·태하리·신촌동·광암동·천부동·나리동], 호수는 277호 1,134명[남 662명, 여 472명], 개간 농지는 4,774.9두락이었다. 1990년 우용정의 보고에 의하면, 개간지는 7,700여 두락이며, 호수는 400여 호, 인구는 남녀를 합하여 1,700여 명이라고 하였다.
[역사적 의미]
1883년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지기 전 쇄환(刷還) 정책과 수토 정책이 실시되는 상황에서 울릉도에 들어가는 것은 피역(避役)의 무리로서 범법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883년 이후 개척령에 의해 울릉도에 들어간 개척민들은 합법적인 이주민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울릉도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국제법 위반자로서 일본으로의 소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개척령에 의한 이민이 섬을 대상으로 한 어민들이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농업 이민이었던 점에서 개척 정책의 한계성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