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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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伊城縣 |
영어공식명칭 | Iseong-hyeon |
이칭/별칭 | 두이현(豆伊縣),두성현(杜城縣),이성현(伊城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박노석 |
관할 지역 | 이성현 -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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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시대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지방통치구역.
[개설]
백제 때에는 두이현(豆伊縣), 통일신라시대에는 두성현(杜城縣), 고려시대에는 이성현(伊城縣)이었다.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일대에 해당한다. 이성현의 치소는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이성리로 추정한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현재 전라북도 완주 지역은 조선시대의 전주부와 고산현이 있었던 지역이다. 고려시대 때 전주부에는 우주현(紆州縣), 이성현(伊城縣), 옥야현(沃野縣), 이성현(利城縣), 완산(完山)이 있었고, 고산현에는 고산현(高山縣), 운제현(雲梯縣)이 있었다. 이 중 이성현(伊城縣)은 조선시대에 전주의 직촌이 되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권 제36 잡지 제5, 지리3 전주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杜城縣, 本百濟豆伊縣, 景徳王改名. 今伊城縣.”
『동국이상국집』 제 23권, 기,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다음날 이성(伊城)에 들어가니, 민호(民戶)가 조잔(凋殘)하고 이락(籬落)이 소조(蕭條)하여 객관(客館)도 초가(草家)요, 아전이라고 와 뵙는 자는 4~5인에 불과하였으니, 보기에 측은하고 서글펐다.”
『고려사』 권 57, 지 권제 11, 지리 2, 전라도 전주복 이성현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伊城縣本百濟豆伊縣[一云往武], 新羅景德王, 改名杜城, 來屬. 高麗, 改今名, 仍屬.”
『고려사』 권 82, 지 권제 36, 병 2, 전공주도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全公州道掌二十一. 參禮[全州], 良材[厲陽], 鶯谷[伊城], 玉庖[雲梯], 材谷[咸悅], 彩平[金馬], 榛林·內材[金堤], 苽原[古阜], 新保·居山[泰山], 川原[井邑], 蘇安[臨坡], 進賢[進禮], 珍化[珍同], 濟元[進禮], 敬天[公州], 平川[連山], 得延·利道[公州], 貞民[懷德].”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전주부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이성현(伊城縣)은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두성현(杜城縣)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이성현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 성씨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이성(伊城) 조(趙)·배(裵)·장(張)·구(仇)·염(廉)·고(高)·온(溫).”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이성 폐현(伊城廢縣)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인데, 왕무(往武)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두성(杜城)으로 고치어 예속시키고 고려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 16권, 지리전고, 우도 전주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이성(伊城)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두이현(豆伊縣)이니, 왕무(往武)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에 두성(杜城)으로 고쳤다.”
『대동지지』 전주부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이동(伊東)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이남(伊南)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이서(伊西)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이북(伊北)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위의 4면은 이성(伊城) 땅이다.”
『여지도서』 보유편 전주, 완산지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伊城場(在府西二十里一日六日”
『여지도서』 보유편 전주, 완산지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伊城廢縣(在府西二十五里本百濟 豆伊縣一云往武新羅改名爲金堤郡領縣高麗初來屬)”
[내용]
고려시대의 이성현(伊城縣)은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대에 두성현(杜城縣)으로 바뀌었으며, 고려시대에 이성현(伊城縣)으로 바뀌고, 조선 초기인 1409년(태종 9) 임내 혁파 이후에 전주부의 직촌으로 편제된 것으로 보인다. 두이는 왕무(往武)라고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이성현은 전주부에서 서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조(趙), 배(裵), 장(張), 구(仇), 염(廉), 고(高), 온(溫)씨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이성현에는 앵곡역(鶯谷驛)이 있었으며, 고려 현종이 나주로 몽진할 때 이곳에서 머물기도 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다음날 이성(伊城)에 들어가니, 민호(民戶)가 조잔(凋殘)하고 이락(籬落)이 소조(蕭條)하여 객관(客館)도 초가(草家)요, 아전이라고 와 뵙는 자는 4~5인에 불과하였으니, 보기에 측은하고 서글펐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이성현의 사정이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임내 혁파가 있은 후에 전주부의 직촌으로 편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동(伊東), 이남(伊南), 이서(伊西), 이북(伊北)의 4개면으로 편제되었다. 치소에 대해서 정구복 외[『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15~316쪽]에서 지금의 완주군 이서면(伊西面) 이성리(伊城里)라고 했으며, 김종권[『완역삼국사기』 광조출판사, 1972, 557쪽]은 지금의 전주, 김제로 비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