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623
한자 崔龍角
영어공식명칭 Choi Yong-gak
이칭/별칭 좌상(左相),문충공(文忠公)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거주|이주지 최용각 낙향지 - 위봉산(威鳳山)
묘소|단소 최용각 묘소 -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 산46 지도보기
성격 인물
성별 남자
본관 전주(全州)
대표 관직 검교 대호군(檢校大護軍)|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정의]

고려 후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관인.

[개설]

최용각(崔龍角)전주최씨 문성공파 시조 최아의 둘째 아들로 대호군공파 중시조이다.

[가계]

최용각의 아버지는 전주최씨 문성공파 시조인 최아이다. 최아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최용각은 둘째이다. 최용각의 아들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최철(崔哲)이고 부인 정경부인 허씨(許氏)는 중호군(中護軍) 허선(許瑄)의 딸이자 지동주사(知東州事) 허정(許程)의 손녀이다.

[활동 사항]

최용각은 「최용각묘도비」에 따르면 고려조에 문과 장원을 해서 보문각 대제학에 전임하고, 무예와 용맹으로 큰 공을 이루어 높은 품계에 가자 되는 등 왕이 칭찬하고 총애했으나, 고려의 국운이 장차 기울 것을 알고 정사에 참여할 생각이 없어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관례로 대호군을 내려주었으나 사양하고 돌아와 노년을 완주 위봉산의 산수 사이에서 마쳤다고 한다. 「위봉사 중수기」에는 고려말 최용각이 말을 타고 다니며 산천을 누비다가 높은 산에 이르러 남쪽을 바라보니 세 마리 봉황이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어서 이곳에 가람을 조성하고 절의 이름을 ‘위봉사(圍鳳寺)’라 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지금은 ‘위봉사(威鳳寺)’로 바뀌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위봉사 「극락전 중수기」에도 나오고 있다. 이는 최용각위봉사의 창건 혹은 중수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학문과 저술]

최용각은 고려 공민왕 조에 공을 여러 번 패초(牌招)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위봉산수(威鳳山水)의 사이에서 즐거이 있을 때 정각(亭閣)을 두어 시(詩)를 써 이르되 ‘스스로 정사(政事)에 참여함을 즐기다가 인하여 승지(勝地)를 만나도다. 산 까마귀는 언덕 나무에서 울고 들오리는 흐르는 시내에서 흐르도다. 눈이 쌓이니 만산이 여운 듯하고 마을이 가까우니 한길이 그윽하도다. 늦게야 이 절경을 만나 말을 멈추고 다시 지루한 세월을 보내노라’고 했다. 암자(庵子)에 유고(遺稿) 일궤(一櫃)와 유리호(琉璃壺)와 철장(鐵杖)을 보전했다고 하나 현재는 보존되지 못하고 있다.

[묘소]

최용각의 묘소는 고산(高山) 동상면(東上面) 운암산(雲岩山) 대아동(大雅洞) 남쪽 언덕 장군목[南岡缶項] 을좌(乙坐)에 있다. 현재 주소는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 산46이다.

[상훈과 추모]

최용각은 ‘좌상(左相)’이라 하고 시호를 문충공(文忠公)이라고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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