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7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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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建重 |
영어공식명칭 | Yun Geon-jung |
이칭/별칭 | 소암(昭庵)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선태 |
출생 시기/일시 | 1897년(고종 34) - 윤건중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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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6년 - 윤건중 전라북도 군산 영명중학교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3월 25일 - 윤건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 |
수학 시기/일시 | 1922년 - 윤건중 튀빙겐대학 입학 후 뮌헨대학 정경과 전학 |
수학 시기/일시 | 1927년 5월 - 윤건중 뮌헨대학 정경과 졸업 |
몰년 시기/일시 | 1987년 3월 27일 - 윤건중 사망 |
출생지 | 윤건중 출생지 -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 |
학교|수학지 | 윤건중 학교 - 군산 영명중학교 |
학교|수학지 | 윤건중 수학 - 일본 |
학교|수학지 | 윤건중 수학 - 독일 |
활동지 | 윤건중 활동지 - 완주군 봉상면 |
활동지 | 윤건중 활동지 - 군산 |
활동지 | 윤건중 활동지 - 서울 |
묘소 | 윤건중 묘소 -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 애지 제2-858 |
성격 | 독립운동가|행정가 |
성별 | 남자 |
본관 | 파평(坡平) |
대표 경력 | 1919년 3월 13일 전주장에서 만세시위주도|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참사|1930년 봉상산업조합 설립|1945년 조선이기공업사 사장|1954년 농림부장관|1977독립운동 유공자 대통령표창|1990년 건국헌장 애족장 |
[정의]
근현대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 출신의 독립운동 및 정치인.
[개설]
윤건중(尹建重)[1897~1987]은 1919년 파고다공원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 후, 1919년 3월 13일 김인전, 김가전 등과 모의하여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활동하다가 독일로 유학했고, 귀국해서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봉상산업조합을 설립했다. 1954년에는 제9대 농림부장관을 역임했다.
[가계]
윤건중은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 우산 출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아호는 소암(昭庵)이다. 아버지는 윤원병(尹元炳)이며, 어머니는 권일(權一)이다.
[활동 사항]
윤건중은 1911년 전주 양성 사립학교를 수료하고, 군산 영명학교를 수료한 후, 일본 동경에서 청산학원을 수료하였다. 1917년 9월 전주 서문학교 집사로 있었다. 윤건중의 사회활동은 독립운동, 사업가, 행정관료와 교육자 역할로 나뉜다. 우선 독립운동은 23세 때 파고다공원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 후 3월 13일 김인전(金仁全), 김가전(金嘉全), 이수연(李守淵) 등과 모의하여 3월 13일 전주 남문시장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뿌리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윤건중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고 1920년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독일 유학을 마치고 1930년 고향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에서 이준목과 함께 봉상산업조합(鳳翔産業組合)을 만들었다. 윤건중은 생강 유통을 주도하며 생강 농가의 소득을 높이는 한편, 조합 수익금으로 봉동에 생강조합 부설 의료원을 설립하는 등 성공적인 사업가의 면모를 보였다. 1936년 윤건중은 삼례로 이거 하여 건중농장 지배인을 했다. 당시 윤건중의 토지는 112정보로 삼례에서 네 번째가 될 정도로 부자였다. 한편 1945년 9월 군산에서 농기를 생산하는 조선이기공업사 사장을 하였다. 1954년에는 농림부장관으로 발탁되었으나 재임 기간이 56일로 길지 않았다. 노년에는 전북대학교에서 독일어 강사를 하며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삼례여자고등학교와 읍사무소 건립에 필요한 토지를 기부하는 등 여생을 보내다 1987년 완주군 고산면 소향리에서 별세하였다.
[묘소]
윤건중은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윤건중은 1977년 12월 독립운동유공자 대통령 표창과 1990년 12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