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0770
한자 朴漢永
영어공식명칭 Park Han-yeong
이칭/별칭 정호(鼎鎬),영호(映鎬),석전(石顚)
분야 성씨·인물/근현대 인물,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하리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박대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0년(고종 7) 8월 18일연표보기 - 박한영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889년(고종 26) - 박한영 출가
몰년 시기/일시 1948년 4월연표보기 - 박한영 사망
출생지 박한영 출생지 -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하리 지도보기
활동지 박한영 활동지 - 전라북도 정읍
성격 종교인
성별 남자
대표 경력 조선불교 교정(敎正)|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동국대학교] 교장|조선불교중앙총무원 제1대 교정

[정의]

근대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출신의 종교인.

[개설]

박한영(朴漢永)[1870~1948]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학승이자 승려 시인으로 불교의 대중화와 민족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앞장섰다. 근대 불교계의 3대 강백으로 존경받았으며, 대고승으로 평가받았다.

[활동 사항]

박한영은 학승(學僧)이자 승려 시인(僧侶詩人)으로, 속명 박한영, 법명 정호(鼎鎬), 법호 영호(映鎬), 시호(詩號) 석전(石顚)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완주군 초포면 조사리[현재 완주군 삼례읍 하리] 창뜸마을에서 1870년 8월 18일[음]에 아버지 박성용(朴聖鏞), 어머니 진양강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공부했으나 17세 때 어머니가 위봉사(威鳳寺)에서 들은 생사법문(生死法文)을 전해 듣고 발심(發心)하여 출가(出家)의 뜻을 품었다. 그리고 19세 때 전주 태조암(太祖庵)에서 출가하였다는 설, 19세 때 위봉사의 금산(錦山) 스님을 찾아가 출가하였다는 설, 강원도 고성 신계사에서 금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 유점사에서 도첩 수여식을 했다는 설 등이 전한다. 23세 때 금산 스님과 함께 금강산에 갔었는데, 그때 벽하(碧下) 조주승(趙周昇)에게서 서예(書藝)를 배웠고, 고환(古懽) 강위(姜瑋)의 시풍(詩風)을 공부했다. 순창 구암사(龜巖寺)에서 개강(開講)한 뒤 해인사(海印寺), 법주사(法主寺), 범어사(梵魚寺) 등에서 불법을 강론했다.

1908년 쇠퇴한 불교를 혁신하려는 뜻을 품고 교단(敎團)의 쇄신(刷新)에 힘을 기울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만해 한용운과 함께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911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조선불교를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통합하려 하자 임제종(臨濟宗)의 전통론을 내세워 이를 저지시켰다. 1913년에는 『해동불교(海東佛敎)』를 창간하여 불교의 혁신과 경술국치의 부당함을 일깨웠다. 1914년에는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1916년에는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의 강사가 되었다. 1926년 서울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의 영재들을 배출했다. 1929년 조선불교 교정(敎正)에 취임하여 불교계를 지도했고, 1931년부터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동국대학교 전신] 교장을 지냈다.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시(詩)와 논문(論文)에 능한 그는 「불교신문」을 통해 차원 높은 논설로 불교의 이론 정립에 힘쓰는 동시에 민중을 교화하고 제도중생하려면 모든 승려가 덕망과 경륜과 사상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한영은 광복 이후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의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다가, 1948년 4월 정읍 내장산 벽련암(碧蓮庵)에서 입적했다. 금봉, 진응과 함께 근대 불교계의 3대 강백(講伯)으로 추앙받았으며, 경사자집(經史子集)과 노장 학설을 두루 섭렵하고 서법(書法)까지 통한 대고승(大高僧)으로 평가받았다.

[사상과 저술]

박한영의 저술로는『석전문초(石顚文鈔)』, 시집 『석전시초(石顚詩鈔)』, 『석림수필(石林隨筆)』, 『석림초(石林抄)』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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