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비가비 명창 권삼득과 소리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001365
한자 朝鮮後期-名唱權三得-
영어공식명칭 Gwan Sam-deuk who is Bigabi Great Singer and Sorigul in Late-Chosun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동현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의 조선 후기 양반 출신 판소리 명창.

[『이우당유고집(二憂堂遺稿集)』에서 본 권삼득]

권삼득은 1771년(영조 47)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에서 안동권씨 양반 가문의 후예로 출생하였다. 『조선창극사』에는 권삼득이 전라북도 익산군 남산리 출생으로 되어있으나, 1971년 전북대학교 철학과 홍현식 교수에 의해 권삼득의 부친 권래언의 문집인 『이우당유고집(二憂堂遺稿集)』이 발견되고, 가계가 밝혀졌다. 권삼득이 소리를 한다고 집안에서 쫓겨났다고 했으므로, 전라북도 익산군 남산리는 쫓겨난 후에 살던 곳 또는 처가가 있는 곳이라는 견해도 있다. 『전북전래지명총람』에서 현재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을 남산면과 같이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남산리는 낭산면일 가능성도 있다. 또 남원이 외가여서 가왕 송흥록 명창의 아버지인 송첨지로부터 소리를 배웠다는 주장도 있다.

권삼득의 부친인 권래언은 안동권씨 추밀공파 28세손으로 이름은 형언(衡彦) 또는 내언(來彦)이며, 자는 공여(拱汝) 또는 사이(士貽)이다. 이우당(二憂堂)은 그의 호이다. 『안동권씨대동세보』에 의하면 권래언은 영조 15년이던 1739년 기미년에 나서, 순조 16년이던 1816년 병자년 8월 14일에 별세하였다. 1828년(순조 28)는 전주의 사인 권래언에게 호역을 면제하였다[給復]는 기록이 있는데, 『대동세보』에는 이학(理學)과 효행이 있어 순조 24년 1824년 정려(旌閭)와 복호(復戶)[조선시대 어떤 특정한 대상자에게 요역과 전세(田稅)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던 일]가 내리고, 예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고 하였다. 묘소는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 이목정 부친 묘 아래 오좌(午坐)[북향]이다.

명창 권삼득권래언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이며, 자는 사인(士仁)이고, 1771년(영조 47)에 나서 1841년(헌종 7) 5월 7일에 별세하였다. 『이우당유고집(二憂堂遺稿集)』에 실려 있는 「이우당기」는 병진년[1796년, 정조 20년] 봄에 초가집 한 채를 짓고 ‘이우당(二憂堂)’이라고 했다는 내용에 이어, 어떤 손님이 그 내력을 묻고 자신이 대답하는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권래언은 “어린 나이에 아버님을 여의어 남의 산에 허술하게 장례를 지냈으니 불효에 걱정이 있고, 내가 노년에 자식을 잘못 길러 타향에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으니, 걱정거리가 자식 사랑을 잘못한 데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걱정거리라면 단지 이 두 가지 걱정인즉, 이렇게 집 이름을 붙인 것은 참으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라고 호를 ‘이우당’이라고 지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근제이우당서후(謹題二憂堂序後)」는 「이우당기」 바로 뒤에 실려 있는데, 권래언의 벗인 강필성이 「이우당기」를 보고 계해년[1803년, 순조 3년]에 쓴 것이다. 「근제이우당서후」도 작자가 권래언으로부터 ‘이우당’이란 호를 지은 연유에 대해 들은 바를 쓰고, 이어 위로 겸 답을 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권래언은 아버지 묘를 이장하지 못한 것을 말한 다음, “내 둘째 아들 삼득이가 내 가르침을 저버리고 술과 음악에 빠진 지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방탕한 사람들을 좇아 놀며, 집을 떠나 밖에 있으면서 밤낮을 잊고 욕됨을 끼치기가 끝이 없으니, 이를 금하고 막을 수가 없고, 또 끝내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이것이 두 번째 걱정입니다. 나는 이것 때문에 그 아픔이 간과 명치에까지 사무쳐서 마음이 울적하고 밖으로도 나타나니, ‘두 가지 걱정거리’라는 말로 호를 삼은 것입니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권래언을 위로하면서 강필성은 “지금까지 삼득이가 노래를 부르고, 술에 취해 난행을 했지만, 이제 도리어 벙어리처럼 노래도 안 부르고, 맑은 정신으로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아버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보면, 양반 출신이면서도 판소리를 부르고 다니는 아들 권삼득을 부친 권래언이 얼마나 치욕스럽게 생각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뒷부분에서 강필성은 이제 권삼득이 소리를 그만두고 아버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다고 했다. 이 글을 쓴 때가 1803년이므로 이때 권삼득의 나이는 서른세 살이었다. 그런데 1810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관우희」에는 모흥갑과 권삼득이 젊은 소리꾼으로 이름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강필성이 이제 삼득이가 노래를 그만두고 아버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다고 한 것은 의례적인 위로의 말일 가능성이 크다.

[비가비 명창 권삼득]

권삼득은 판소리사의 맨 앞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서도 가계를 비롯한 기록이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래서 『조선창극사』에는 맨 앞에 권삼득을 배치하고 있다. 또 1810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관우희」에는 모흥갑과 권삼득이 젊은 소리꾼으로 이름이 있다고 하였다. 이때 권삼득의 나이는 39세였다. 권삼득은 30대부터 이미 이름이 높은 소리꾼이었다.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권삼득을 “천층절벽 불끈 솟아 만장폭포 월렁꿀꿜 문기팔대 한퇴지”라고 하였다. 곧 권삼득은 중국의 문인으로 치면 8대[왕조]에 걸쳐 쇠약해진 문(文)을 일으킨 한퇴지 곧 한유와 같다고 하면서, 그의 소리가 높은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과 같이 우렁차고 힘이 넘쳤다고 하였다. 『조선창극사』에서는 “후인의 평으로는 곡조가 단순하고 그 제작이 그리 출중한 것이 없으나 세마치장단으로 일호차착이 없이 소리 한바탕을 마치는 것이 타인의 미치지 못할 점일 뿐더러 그 천품의 절등한 고운 목청은 듣는 사람의 정신을 혼도(昏倒)[정신이 어지러워 쓰러짐]케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권삼득의 창법은 단순하였으나, 목소리가 매우 크고 좋은 소리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권삼득은 「흥보가」를 잘 불렀으며, 그의 더늠[판소리에서, 명창이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다듬어 부르는 어떤 마당의 한 대목]은 ‘놀보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이다. 권삼득은 덜렁제라는 선율을 개발하였다. 덜렁제는 설렁제, 드렁조, 권마성조, 권조라고도 하는데, 「흥보가」 중 ‘놀보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 「춘향가」의 ‘군로 사령이 춘향을 잡으러 나가는 대목’, 「심청가」의 ‘남경장사 선인들이 처녀를 사겠다고 외치는 대목’, 「수궁가」의 ‘벌떡게가 여쭈는 대목’, 「적벽가」의 ‘위국자의 노래’ 등에 쓰이고 있으며, 높은 음역의 라(la)음을 길게 지속하거나, 높은 음 라(la)에서 낮은 음(La)로 뛰어내려 라(la) - 라(La), 혹은 라(la) - 솔(sol) - 레(re) - 라(La)와 같은 도약형(跳躍形) 선율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매우 씩씩한 느낌을 주는 남성적인 창법이다.

유기룡은 권삼득이 개발했다는 덜렁제에 대하여, “덜렁제는 곡풍이 울툭불툭하는 성깔이 있어서 나약한 그때의 판소리 경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이었다”라고 했다. 판소리는 무가에서 나왔으므로 초기의 판소리는 무가와 같은 슬픈 곡조가 중심이었다. 권삼득은 양반 출신으로 이러한 판소리에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무가와는 다른 음악적 특성을 가진 덜렁제를 개발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기룡은 또 “덜렁제의 특성은 강과 약의 대결, 선과 악과의 대립에서 강과 약이 분별없이 날뛰고 호기를 부리며 덜렁대는 모습을 묘사한 곡조의 흐름”이라고 하였다. 이런 평가로 보아, 권삼득은 초기 판소리의 설움조 일변도의 여성적인 경향에 남성적인 덜렁제 창법을 도입하여 판소리의 표현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를 한 단계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권삼득은 덜렁제의 개발을 통해, 무가적 속성이 강한 슬픔 일변도의 초기 판소리에 남성적이고 씩씩한 선율을 도입함으로써 판소리 음악의 표현 영역을 넓히고, 판소리가 상하층 계급을 아우르는 민족음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실마리를 놓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993년에 전라북도 도립국악원 앞마당에 ‘국창 권삼득 기적비’가 세워졌으며, 2003년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구억리 이목정에 있는 묘역이 정비되었다.

[권삼득이 남긴 이야기들]

권삼득은 양반 출신으로 명창이 된 이른바 비가비 명창이다. 특이한 내력을 가진 소리꾼이었기 때문에 권삼득과 관련된 설화도 많다. 우선 “삼득(三得)”과 관련된 설화들이다. ‘삼득’은 새, 짐승, 사람의 세 소리를 터득했기 때문에 부른 이름이라고도 하고, 천지인 곧 하늘, 땅, 사람 세 가지 소리를 터득했기 때문에 부른 이름이라고도 한다. 권삼득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매미혈에 권삼득의 조부 권세진의 묘를 쓰는 바람에 명창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권삼득과 그의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 이목정인데, 일명 ‘배나무정’이라고도 한다. 배나무에 매미가 앉아서 노래를 부르는 혈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한다. 그래서 이 산 정상에 묘를 쓰면 명창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권삼득의 부인 전주이씨가 다시는 집안에서 명창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조부의 묘를 아래로 옮기라고 해서 옮긴 후에는 명창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또 권삼득이 서당을 다니는데, 재를 넘어갈 때마다 여자가 와서 입을 맞추면서 구슬을 입에다 넣어 주었다고 한다. 선생님이 그 구슬을 삼키라고 일러주어서 권삼득이 구슬을 삼키자 그 여자는 여우로 변하고, 권삼득은 명창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권삼득 묘의 동남쪽 아랫 부분에 소리굴이라는 굴이 있는데, 이 굴에서 권삼득이 소리를 수련했다고 한다. 이 굴이 매미의 입에 해당한다고 하며, 이곳에서 연기를 피우면 산 정상으로 연기가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이 굴에서 소리를 수련하면 명창이 된다는 것이다. 이 소리굴은 깊이도 깊지 않고 크기도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가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실제로 권삼득이 이곳에서 소리를 했을 가능성은 작다. 오히려 권삼득이 명창이 된 후 그 이유를 설명하는 가운데 가까운 곳에 있는 지형지물이 이용된 경우라고 생각된다.

권삼득과 관련된 설화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양반이 소리를 한다고 가문에서 죽임을 당할 뻔하다가 뛰어난 소리 실력 때문에 살아난 이야기이다. 양반이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다. 그래서 권삼득의 아버지는 소리를 못 하게 하였으나 권삼득이 끝내 뜻을 굽히지 않자, 마침내 가문에서 그를 죽이기로 하였는데, 삼득이 태연히 마지막으로 노래 한 곡조를 부르고 죽겠다고 하였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그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더니, 권삼득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감동하여 죽이지는 않고 족보에서 이름을 빼고 쫓아냈다는 이야기가 『조선창극사』에 전한다. 이 설화의 변이형에는 권삼득이 죽기 전에 노래하겠다고 한 이유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권삼득이 죽기 전에 말하기를 소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울고 웃겼는데 짐승은 그렇게 해보지 못했으니, 소 앞에서 소리를 한 번 해보게 해달라고 했다. 권삼득이 소 앞에서 소리를 하니 소가 웃었다. 그래서 소까지 감동하게 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을 죽이는 게 아깝다 하여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실은 권삼득이 암소의 오줌을 묻힌 부채를 들고 황소 앞에서 소리를 하면서 부채를 펼치니 암소의 오줌 냄새를 맡은 황소가 웃었다고 설명을 붙이기도 한다. 이 변이형은 권삼득의 소리 실력보다는 지혜를 강조한 이야기이다.

권삼득의 소리 실력과 관련해서는 권삼득이 ‘뻐꾹 뻐꾹’ 소리를 하면서 용머리고개[전주에서 김제 방향으로 가는 곳에 있는 고개로, 전주시 완산동에서 삼천동 사이에 있음]를 넘어오면, 뻐꾸기가 ‘뻐꾹 뻐꾹’ 하면서 따라 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권삼득이 새타령을 하면 새가 따라서 울었다고 한다. 권삼득 집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권삼득이 노래만 하고 다니고 집안은 돌보지 않아 부인이 베를 짜 팔아서 가난하게 살았는데, 오래 떠돌던 권삼득이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아내는 권삼득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이에 권삼득이 베틀을 잡고 「베틀가」를 부르자 아내가 노래에 감복하여 남편을 따뜻하게 환대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권삼득의 소리 실력이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까지도 감동하게 할 정도로 뛰어났다는 것을 설화로 표현한 것들이다.

권삼득의 사후에 관한 이야기들도 있다. 권삼득이 죽어 안장하고 난 3일 후부터 밤 삼경 때면 무덤이 있는 산에서 분명한 권삼득의 소리가 들렸고, 한바탕 소리가 끝나면 “내 소리 받아가거라”하고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송흥록과 결부된 것도 있는데, 뛰어난 능력의 소리꾼이 죽은 후에 그 소리가 끊어지게 된 것을 안타까워한 민중들의 소망이 반영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예전 권삼득 명창의 무덤 오른쪽 앞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구멍에서 “내 소리 받아가거라”라는 소리가 났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소리 구멍은 앞의 이야기를 증명하는 증거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2003년 묘역을 정비하면서 권삼득과 부인을 합장하고, 봉분을 크게 만들기 위해 위치를 옮겼기 때문에 그 소리 구멍은 이제 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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