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1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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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湖南平野-干拓地-生命水, 大幹線水路 |
영어공식명칭 | Life-giving water of the Honam Plains and reclaimed land, Daeganseon Waterway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성욱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어우리에서 시작해서 전라북도 익산시까지 이어진 수로.
[1910년대 이전의 농업용수 공급]
호남평야는 만경강과 동진강에 의해 형성된 충적지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했다. 그러나 만경강과 동진강의 본류는 감조하천(感潮河川)[조석의 영향을 크게 받는 하천]이기 때문에 밀물 때는 바닷물이 들어와서 본류의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감조하천이라는 특징 때문에 과거에 축조된 대규모 둑인 벽골제, 눌제, 요교제는 동진강이나 만경강의 본류가 아닌 지류에 축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저수지도 조선시대 이후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훼손되었으며, 호남평야의 농업용수 공급은 지류와 그 인근에 축조된 소규모 저수지가 담당했다.
조선시대인 1661년(현종 2)에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부근에 제방을 축조했고, 18세기에는 궁방(宮房)이 자본과 기술을 제공하고 지방민의 노동력으로 ‘독주항(犢走項)’이라는 관개시설을 만들었다. 독주항은 삼례 부근 만경강에 만든 보와 수로 시설인데, 수로 길이는 약 20여km, 간선과 3개의 지선으로 구성되어, 주변 22개 마을에 관개한 수리시설이다. 훗날 조선 말기에 이완용에 의한 부분적인 제방 축조 및 농경지 조성이 있었으며, 민영익이 소유한 것을 1910년 전익수리조합이 매수하기도 한다.
만경강에서 농업용수의 취수가 가능한 구역은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의 비비정 부근이었다.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의 호남평야는 평탄한 충적지라는 지형 조건은 농업에 적합했지만, 감조하천으로 인한 본류의 농업용수 이용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삼국시대 때부터 1910년대까지 본류보다는 지류에 소규모의 저수지를 축조하여 이용하는 수준이었다.
[수리조합의 결성]
지류나 계곡에 저수지를 축조하여 물을 이용하던 수리 방법은 1910년대에 대규모의 수리조합이 결성되기 시작하면서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이전에도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에는 비비정 부근에서 물을 취수하여 공급했던 독주항(犢走項)이라는 수리시설이 있었으나, 1908년 이후 대규모 수리조합의 결성은 수리이용 패턴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당시에 만경강 북부 지역에는 5개의 수리조합이 만들어졌다.
먼저, 옥구서부(沃溝西部) 수리조합은 1908년에 전라북도 군산시 미룡동에서 설립되었으며, 수리지역은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면 수산리, 옥정리, 오곡리, 이곡리, 선제리, 전라북도 군산시 미면 미룡리, 개사리 일대였다. 전익(全益) 수리조합은 1909년 대장촌을 중심으로 설립되었으며, 수리 지역은 동산리에서 삼례에 이르는 전라북도 전주군 우서면, 익산군 춘포면, 동일면 일대였고, 민영익 소유였던 독주항을 인수하였으며, 수원은 비비정이었다. 임익(臨益) 수리조합은 1909년 황등면에서 설립되었으며, 수리지역은 요교호에서 임익남부 수리조합 북부 일대였고, 황등제[요교제]를 수원으로 하였다. 임익남부(臨益南部) 수리조합은 1909년에 설립되었으며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에 있었다. 수리 지역은 동산리와 제상리에서 석화리, 장좌리, 입석리 일대였으며, 전주천과 고산천이 합쳐지는 지점에 제를 만들고 비비정에서 취수하였다. 임옥(臨沃) 수리조합은 1911년에 설립되었으며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에 있었다. 수리 지역은 임피군 서남부와 옥구군 동부일대였다. 비관개 기간에 하천수를 수로나 저지에 저장했다가 공급하는 형태였다. 이 후 임옥과 임익남부 수리조합은 1920년 익옥(益沃) 수리조합으로 합병되었다.
이 중 임익남부(臨益南部) 수리조합과 전익(全益) 수리조합은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에 있는 만경강 본류의 비비정에서 취수하여 수로를 통해 농업용수를 공급하였으며, 임익(臨益) 수리조합은 기존에 있었던 황등제를 수원으로 이용하였고, 옥구서부(沃溝西部) 수리조합은 미제와 선제를 취수원으로 하였다. 그리고 임옥(臨沃) 수리조합은 수원 자체를 확보하지 못하고, 비 관개기간에 하천수를 수로나 저지에 저장하였다가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처럼 1910년대 만경강의 수리 이용은 수리조합의 결성으로 집단화와 규모화는 되었으나, 이용하는 수원 자체는 기존의 저수지나 만경강 지류를 좀 더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대아리 저수지와 대간선 수로의 건설]
1908년부터 조직된 수리조합들은 기존의 수원에 한계를 느끼고, 보다 안정적이고 풍부한 물 공급이 필요했다. 특히 1920년 4월부터 시작된 산미 증산계획과 만경강 하류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지금까지의 기존 저수지인 황등제, 미제, 선제나 기존 지류인 탑천 및 취수시설인 비비정 취수구에 한계를 느꼈다. 이 시기에 고려되었던 수원 공급계획은 만경강 지류인 고산천 상류에 대아댐, 경천댐, 동상댐의 축조와 금강 수계에 용담댐을 건설하여 유역변경식으로 물 공급을 하는 방안이었다.
특히 군산 서부 지역의 간척에 쓰일 물 공급이 필요했던 임옥 수리조합과 임익남부 수리조합은 대아댐 설계를 계기로 1920년에 익옥 수리조합으로 합병했다. 1923년 대아댐의 완공과 함께, 대간선의 확장과 삼례 취입언의 건설 그리고 수로의 끝부분에 저수용으로 옥구저수지를 만들어 새로운 물 공급 체계를 완성했다. 옥구저수지는 불이농장을 간척한 불이산업조합이 간척지에 만든 저수지로 인공도수로에 의한 물 공급을 전제로 만들었다.
또한 황등제를 수원으로 하던 임익 수리조합은 고산천의 또 다른 지류인 화평천이 흐르는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에 1937년 경천저수지를 만들어 수원을 확보하고, 기존에 수원으로 이용했던 황등제를 폐지하여 개답하였다. 경천저수지는 1935년에 착공하여 1937년에 완공하였다. 이후 1963년에 1m 높임 공사를 시행하기도 한다. 수로는 익옥 수리조합과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익옥 수리조합과 임익 수리조합의 수원지는 만경강의 지류인 고산천 수계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만경강의 지류 중에서 고산천은 대규모 저수지 축조에 유리한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923년의 만들어진 도수로는 대아댐과 경천댐 → 고산천[자연하도 이용] → 어우리보[취입구] → 봉동읍 구미리 → 별산천[취입언] → 삼례읍 신금리 취입구 → 마천리 → 구 비비정 수로[독수항]와 연결 → 춘포산까지 기존 수로 확장 이용 → 동산리 → 목천포 → 지경리 → 마산리 → 임사리 → 중제리 → 옥구서부 수리조합 횡단 → 개정리 → 옥구 신가입 구역으로 이어지는 약 65km에 달하는 대규모 인공수로였다. 이와 함께 1926년에는 전라북도 익산군 오산면 목천리 지역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경지정리가 시행되는 등 농업용수 개발과 농지기반 조성 사업이 동시에 시행되었다. 또한 만경강 하류의 개간과 배수시설 및 조수 역류 방지용으로 1935년 만경강의 지류인 탑천에 갑문(閘門)[보의 상하류 사이에서 선박을 통과시키기 위해 수위를 조절하는 장치]을 설치하였다.
한편 1939년의 대한발을 경험하면서 4개의 수리조합은 1941년 ‘전북 수리조합’으로 통폐합되었다. 모든 수리조합이 주요 수원을 고산천 수계[대아댐, 경천댐]에 의존했기 때문에 통합이 이루어지기는 쉬웠다. 이후 전북 수리조합은 더욱 근본적인 수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대아댐 상류에 동상댐을 1959년에 착공하여 1966년 3월에 완성하였다. 높이 30m의 동상댐은 대아댐의 상류인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수만리에 신설되었으며, 2001년 금강 수계에 용담댐을 건설하고 유로를 변경하여 농업용수와 전력을 동시에 얻으려는 계획까지 수립했었다.
[대간선수로의 역할]
만경강과 별도로 축조된 약 65㎞의 인공수로인 대간선수로가 만경강 북부에 축조된 것은 만경강 본류가 감조하천으로서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어려운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이전까지는 만경강 본류로 흘러드는 지류의 물을 저수하여 공급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산미증산계획에 따른 농업용수 공급과 옥수 서부의 불이농장 간척 사업 등으로 대규모 수원이 필요했다. 따라서 만경강 상류 지류인 고산천 상류에 대아댐[1923년]과 경천댐[1937년]을 만들고, 이 물을 감조하천인 만경강의 본류와는 별도로 수로를 만들어 공급하게 되었다.
1945년까지 축조된 만경강 이북 지역의 수리시설은 삼국시대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황등제[일명 요교제], 회현방조제[1922년], 대아댐[1923년], 왕궁저수지[1931년], 탑천갑문[1935년], 경천댐[1937년] 등이 있었다.
1945년 이후에는 만경강의 지류에 구이저수지[1963년], 동상댐[1966년], 만경강 제수문[1970년], 대아신댐[1989년], 금강하구언[1990년], 용담댐[2001년] 등의 수리시설이 추가되었다. 대간선수로는 만경강 북부의 호남평야를 연결하면서 전라북도 완주군, 전라북도 익산시, 전라북도 군산시 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끝 지점에는 옥구저수지를 만들어 불이농장의 간척사업[1913년~1918년]에 따른 농지조성 공사에 따른 물 공급을 가능하게 했다.
1923년에 완공된 대아댐에 의한 물 공급이 지류와 저수지를 연결하는 인공도수로에 의해서 이루어짐으로써, 만경강 본류는 배수로의 기능을 부여받게 되었다. 즉, 만경강 본류는 홍수와 범람이라는 부정적 측면의 개선 대상이 되었고, 홍수 및 범람 방지를 위한 원활한 배수 기능과 하천 주변과 하류의 배후습지를 농업용지로 확보하기 위한 개조작업, 즉 직강화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본류 정비 단계에서의 가장 핵심은 1924년부터 1940년까지 진행된 만경강 본류와 지류의 직강화 공사이다. 특히 1929년, 1933년, 1938년에 만경강 본류의 많은 부분에서 직강화가 이루어졌다. 직강화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던 구간은 사행이 심하게 이루어졌던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유강리의 동자포에서부터 신복리 구간과 마전리에서 강흥리 구간이다. 하천의 직강화로 만경강은 수로의 역할은 상실되었다. 본류의 직강화와 함께 하류 지역의 농경지 개간이 동시에 이루어졌는데, 특히 하류부의 지경리에서 어은리까지의 강북과 동지산과 소토리 사이의 강남 방조제가 이 시기에 축조되었다. 만경강의 직강화로 인하여 강좌리, 동자수문, 신천리, 유천리, 신복리, 마산리의 신기촌, 난산앞 유로, 강흥리의 신유강, 대장촌리의 춘포초교 앞 등에 옛 도랑이 남아 있게 되었다.
직강화 공사의 결과 사행하천이었던 만경강은 직선화되어 물흐름이 좋게 되었고, 홍수 때에 범람을 방지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만경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으로의 하천 주변 토지의 위치 변화를 가져왔다. 이렇게 위치가 변화된 지역은 1957년과 1973년에 행정구역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이 당시 하천의 유로 변화 때문에 행정구역이 바뀐 지역은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조산리,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구복리,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삼정리 등이다. 그러나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의 구담마을은 만경강의 직강화에 의해서 강북에서 강남으로 위치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강북의 춘포면에 속해 있다. 만경강 본류의 직강화 공사와 함께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일대의 경지정리[1967년],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의 만경강 제수문 설치[1970년], 전라북도 익산시 목천지구 배수 개선사업[1984년] 등 주변 토지의 경지화 작업이 지속해서 이루어졌다.
만경강의 지류인 고산천의 최상류부에 대아댐과 경천댐을 건설하고, 확보된 수자원은 기존의 만경강 물길을 이용하지 않고 새로운 인공도수로를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만경강 본류의 의미와 역할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만경강의 본류는 직강화 공사에 의해서 홍수조절용 수로 또는 홍수 때 배수로의 역할이 부여되었고, 높은 인공 둑의 축조 때문에 인간과 하천의 관계를 단절시키게 되었다. 즉, 인공 제방을 통해서 인간은 하천의 홍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게 되었지만, 만경강 본류 자체는 주민의 삶에서 유리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1992년 새만금 간척공사가 시작되면서 만경강 본류는 단순히 배수로의 역할이 아닌,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으로의 변화를 요구받았고, 만경강의 수질 개선과 함께 만경강에 대한 주민의 인식이 변화했다. 그 결과 만경강은 생태하천과 지역 주민의 여가 공간으로서 새로운 역할이 부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