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019 |
---|---|
한자 | 南海海神祭-殿堂-南海神祠 |
이칭/별칭 | 남해신 사당,남해당,남해신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남해당로 65번지 |
집필자 | 변남주 |
신사 | 남해신사 -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산1005번지 |
---|
[정의]
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제사를 올렸던 전라남도 영암군의 사당.
[개설]
전라남도 영암군 남해신사(南海神祠)는 우리나라 3대 해신제 중 하나인 남해신사 해신제를 올렸던 곳이며, 나라의 안녕과 비를 바라는 기우제를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남해신사라는 이름은 『고려사(高麗史)』·『동국 여지지(東國輿地志)』·『여지도서(輿地圖書)』에 나오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남해신 사당(南海神祠堂)으로, 『광여도(廣輿圖)』·『해동 지도(海東地圖)』에는 남해당(南海堂)으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남해신단(南海神壇)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해신사의 기원에 대하여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으나, 조선 세종 무렵에 중국을 본따 중요한 곳에 제사를 모셨는데 이 제사 장소에 남해신사가 포함된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고려 현종 때 남해제가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금성 일기(金城日記)』, 그 밖의 고고 발굴 조사 결과 등을 살펴보아도 모두 15세기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해신사가 있는 곳은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산 1005번지이다. 남해신사에서 북동쪽 25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남해포가 있는데, 1980년 영산강 하굿둑이 막아지기 전까지는 바닷가였으나 현재는 삼포강의 하류이다. 삼포강은 남해포에서 약 4㎞를 더 흘러 영산강 본류와 합류한다.
남해신사가 있는 시종면 지역은 본래 백제의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에 속하였는데, 신라가 반남(潘南)으로 고쳐서 영암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전기 940년 행정 구역 개편 때에는 나주에 편입되었던 반남현의 일부였다. 고려에 이어 조선 때에도 나주목 종남면에 속하였다가 1895년(고종 32)에 영암군으로 소속을 옮겨 오늘에 이른다.
[고려 현종 때 연원설]
남해신사 제사가 시작된 시기가 고려 현종 때부터라는 설의 근거는 두 가지이다. 그중 하나는 1908년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나오는 “고려 1028년(현종 19)에 비로소 사전(祀典)에 올렸다.”라는 기록이다. 이는 『고려사』에 나오는 “1025년(현종 16) 5월에 해양도[지금의 전라도]의 정안현(定安縣)[지금의 장흥군]에서 두 번이나 산호초를 진상하였으므로 남해신을 사전에 승격시켰다.”라는 기록을 옮겨 적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남해신’이 나주[지금의 영암군]의 남해신사를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더욱이 남해신 제사에 관한 기록은 ‘현종 16년 남해신’ 외에는 『고려사』에서 전혀 언급이 없기에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느끼는 견해도 있다.
또 다른 근거는 현종과 관련한 설화로,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1010년] 현종은 난리를 피하여 나주로 떠났고 남해포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 백발의 남해포 수신이 나타나 무안의 몽탄으로 피하라고 하여 그에 따라 재빨리 몸을 피함으로써, 뒤이은 거란군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당을 짓고 여섯 개 고을[나주·영암·해남·강진·영광·함평] 수령들에게 1년에 한 차례씩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제사를 지낼 때 무안의 주룡량에서 용이 나타나 남해포로 들어온다.”라는 내용이다. 이 설화는 꿈 속 백발노인의 말을 듣고 위기를 넘긴 왕건의 몽탄 설화와 거의 비슷하다.
실제로 고려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나주에 1011년 1월 13일에서 1월 31일까지 18일간 머무른 적이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누군가가 현종 관련 설화를 창작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거란이 나주까지 침입하여 현종을 공격한 사실도 없다. 따라서 남해신사가 고려 현종 때부터 존재하였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조선 시대의 남해신사]
남해신사가 기록 속에 확실하게 처음으로 등장하는 때는 조선 전기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무렵에 중국을 본따 나라에서 제사를 모신 것으로 나온다. 그중 가장 큰 제사인 대사(大祀)는 사직과 종묘에서, 그다음 크기의 제사인 중사(中祀)는 총 열네 곳의 산과 바다와 강을 각각 4악(嶽)·3해(海)·7독(瀆)으로 정하여 지냈다. 중사 중에서 3해는 강원도 양양의 동해, 전라도 나주[지금의 영암]의 남해, 황해도 풍천의 서해인데, 이 남해가 바로 남해신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1437년(세종 19)에는 제사를 정비하면서 “나주의 남해는 중사이고 묘의 위판은 ‘남해지신(南海之神)’이라고 쓰고, 금성산은 소사(小祀)이고 묘의 위판은 ‘금성산지신’이라고 써서 소재관[나주 목사]이 제사를 행하라.”라고 하였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남해신사의 제례는 평사(平祀)였고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서 제사를 지냈다. 또한 『동국 여지지』,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에서는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중사로 모셨던 것으로 확인된다. 특별히 남해신사에서는 전염병이 심하게 돌 때 질병과 관련한 제사인 여제(癘祭)를 행하거나,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모시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남해신사는 조선 시대에 간행된 각종 지리지와 17세기 이후의 각종 고지도에도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처럼 남해신사는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위하여 남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중요한 곳이었다.
[『금성 일기』의 남해제 기록]
조선 전기의 현황은 『금성 일기』에 자세히 전한다. 『금성 일기』는 나주목의 관청에서 기록한 일기로, 고려 시대인 1364년(공민왕 13)에서 1481년(성종 12)까지 약 120년 동안을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고려 시기에는 남해신사에 임금이 직접 제사에 쓰일 향을 친히 제관에게 전하는 친전향(親傳香)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성 일기』에는 조선 세종 때에 친전향과 관련한 벼슬아치가 처음으로 파견되었다고 나오는데, 이는 『세종실록(世宗實錄)』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중앙에서 파견된 벼슬아치는 기은 별감(祈恩別監) 또는 제향 별감(祭香別監)이라고 하였으며 주로 왕을 보좌하는 내시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횟수는 『금성 일기』 중 1425~1473년까지의 기록에서 22회가 확인된다.
웹사이트 플러그인 제거 작업으로 인하여 플래시 플러그인 기반의 도표, 도면 등의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를 잠정 중단합니다.
표준형식으로 변환 및 서비스가 가능한 멀티미디어 데이터는 순차적으로 변환 및 제공 예정입니다.
위의 기록을 보더라도, 파견된 관리는 주로 임금 가까이에 있었던 내시였다. 봄의 춘제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서 그믐까지 이루어졌는데, 이때는 기은 별감이 제사에 거의 동참하였다. 그러나 가을의 추제 때에는 별감들이 거의 오지 않거나 향축만 전달하고 떠났다. 이로 보아 추제보다는 춘제를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발굴 조사 결과]
남해신사 터는 1997년 10월부터 1998년 1월까지 목포 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담장을 갖춘 2단 형태의 제사 유적, 건물 터, 기와 조각, 도자기 조각 다수, 동전 아홉 점 등이 발굴되었다. 이 중에서 도자기는 완제품으로 제사를 올리고 나서 조금씩 의도적으로 깨뜨려서 버린 것으로 밝혀졌다. 또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도자기를 분석한 결과, 조선 전기 15세기의 분청사기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도자기들로 조사되었다.
또한 중국과 일본의 옛날 동전도 발견되었다. 중국 청나라의 도광통보(道光通寶) 한 점과 일본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때에 생산된 관영통보(寬永通寶)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남해신사가 국제적인 제사 장소였을 가능성도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남해신사의 복원과 현황]
1986년 9월 29일 ‘남해당지(南海堂址)’라는 이름으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97호에 지정된 남해신사 터는 1997년 발굴 조사를 거쳐, 2001년 신당과 외삼문을 마한 문화 공원의 일원으로 복원하였다. 2003년부터는 해신제의 형태로 남해신사 추계 대제를 지내고 있다.
2012년에 열린 남해신사 추계 대제 행사는 남해신사 제례 보존 위원회의 주관으로 지냈다. 이 행사에서 첫 잔을 올리는 제관인 초헌관에는 향교의 전교가,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인 아헌관에 시종면장이,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인 종헌관에 시종 중학교 교장이 나서는 등 열네 명의 제관이 구성되었고, 영암군 유도회 부회장이 집례를 맡아 지역민과 함께 국태민안과 지역 주민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