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2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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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倉浦口 |
이칭/별칭 | 서창리 포구,창촌 포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변남주 |
비정 지역 | 서창리 서창 포구 -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읍 서창리 970-15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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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포구 |
관련 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지(大東地誌)』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읍 서창리에 있었던 포구.
[개설]
서창 포구는 조선 시대 서창(西倉)에 있었던 포구이다. 조선 시대 영암의 서쪽에 있는 창고라 하여 서창이라 하였으며, 조선 시대 서호면, 학산면, 삼호읍 일대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하였던 창고이다. 『대동지지(大東地誌)』 창고조에 의하면 “서창은 영암에서 서쪽으로 40리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영암군 삼호읍 서창리 원서창 마을에 창고가 있었다.
서창과 관련된 포구는 서창 서쪽에 있는 안산의 동쪽에 있었다. 현재 직강화된 망월천은 조선 시대에는 독천(犢川)의 서쪽과 통하는 바다의 갯고랑이었고, 안산[96m]의 동쪽을 돌아 흘러 뱃길이 되었다. 서창의 포구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은 영암의 망호리 해창에 이어서 군서 해창으로 날랐다.
[명칭 유래]
조선 시대에 세곡을 보관하던 서창 창고에서 유래한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 정부 세곡을 운반하던 포구였다. 일제 강점기 초에는 목포를 왕래하는 배가 다녀, 여객은 물론 서창 인근에서 생산된 쌀과 면화를 거두어 목포 선창으로 운송하였다.
해방 후 삼호읍 동호리와 학산면 신덕리 사이를 막는 감치 제방이 만들어지자 서창 포구는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였다. 감치 제방의 남쪽에 서창 포구를 대신하는 감치 포구가 만들어져 목포를 왕래하는 배가 다니기도 하였으나, 1980년 영산강 하굿둑이 막아지면서 감치 포구도 기능을 상실하였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읍 서창리 970-15답에 있었다.
[관련 기록]
“서창은 군의 40리에 있다[西倉在郡四十里].”[『여지도서(輿地圖書)』 창고조]
“서창은 서쪽 40리에 있다[西倉在西四十里]”[『대동지지』 창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