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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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변남주 |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침입하여 영암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포함하지만, 때로는 1차와 2차를 나누어 1차는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부르며 2차는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칭하기도 한다.
[역사적 배경]
1591년 3월 일본이 조선에 전달하였던 요구는 가도입명(假道入明), 곧 ‘명으로 가려고 하니 길을 빌려 달라.’라는 것이었다. 명나라 정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드러난 명분이지만 화평 교섭에서 마지막까지 고집하였던 것이 조선 남부 영토를 넘겨받는 것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사실상 침략의 첫째 목적은 조선의 영토 획득에 있었다.
[경과]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 수군이 부산포를 침입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이틀 만에 동래성이 함락되면서 육전에서는 연패를 거듭했다. 영암군수 김성헌(金成憲)은 의병장이었던 고경명(高敬命)의 지휘 아래로 들어가 금산 전투에 참가하였지만 전사하였다. 결국 1592년 6월 15일 평양성이 함락되고 선조는 의주로의 피난길에 올랐다.
연패를 거듭하는 육전과는 달리, 해전에서는 전라 좌수사인 이순신의 함대가 1592년 5월 7일 옥포에서 일본 함선 26척을 격파하고 전라 우수영 이억기의 함대와 연합하여 사천포·당포·한산도 등에서도 연승하였다. 1597년 9월 16일에는 명량 수로에서 이순신 등이 함대 12척으로 일본 함대 130여 척을 격파하고, 전라도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영암에서는 정운(鄭運) 장군, 김완(金完) 장군 등이 이순신 막하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김극희(金克禧) 장군과 아들 김함(金涵) 장군 또한 한산도 대첩과 명랑 대첩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한산도에서 왜군을 격퇴하던 중 선상에서 함께 전사하였다. 또한 전몽성(全夢星)·전몽진(全夢辰) 형제, 유장춘(柳長春) 등은 지금의 학산면 밤재에서 왜적 수백 명을 참살하고 월출산으로 진을 옮겨 해암포에서도 적선 수십 척을 격퇴하였으나 순절하였다.
[결과]
동아시아 삼국은 모든 국력을 동원하여 벌였던 임진왜란 탓에 많은 피해와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은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하고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집권하였으며, 명나라도 전쟁 후유증으로 점차 쇠퇴하여 여진(女眞) 세력에 패권을 빼앗겼다.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보았다.
정유재란 당시 명량 해전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해상에서 영암, 해남 등지로 상륙하여 전라 우수영, 해남읍성에 침입하여 불을 질렀고 영암에서 난동을 부리고 도갑사에도 불을 질렀다.
[의의와 평가]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영암 출신 수군들은 혁혁한 공을 세웠고, 영암 지역민들은 솔선하여 의병을 조직하고 일본군에 맞서 전투에 참여하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