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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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강욱 |
[정의]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영암의 연안 및 내륙에 출몰하였던 일본 해적.
[개설]
왜구는 13세기 “왜구금주(倭寇金州)”라는 구절과 함께 역사 속에 등장하였다. 고려로 침입한 왜구는 미곡을 실은 조운선 약탈과 인명 살상 등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 섬, 연안에 사는 사람들은 연해 및 육지로 이주하여 섬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을 정도였다. 영암도 1350년(고려 충정왕 2)에 순천부에 왜구가 침입하여 영암 지역의 조운선이 침탈당했다는 기록을 보면, 왜구에 의한 약탈 지역 중 한 곳이었을 것이다.
[공도 정책과 토벌]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피폐화된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침향했던 사례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암 지역은 왜구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은 유달리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해남의 화원 반도가 영암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지리적인 이유 탓으로 왜구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암은 왜구의 침탈을 받은 연해 지역의 주민들이 임시로 이주해 오는 피난소 역할을 하였다. 공도(空島)[섬을 비움]라는 정책 하에 진행되었으며, 대표적 사례로 진도의 주민들이 현재의 영암군 시종면으로 피난 온 것을 들 수가 있다. 이후 영암 시종면 태간리 명산을 거쳐 1408년(조선 태종 8)에 해남으로 옮겨 갈 때까지 60여 년 간에 영암에서 피난 생활을 하였다.
왜구의 침입에 대하여 고려 정부는 회유와 토벌의 양면으로 대처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무력에 의한 토벌책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수군을 중심으로 한 고려군은 적극적인 해상 방어에 임하였다. 왜구의 활동은 점점 위축되었으며, 1382년(우왕 8) 이후 왜구의 침입 횟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달량진 왜변]
달량진은 현재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있으며 해남군과 완도군 달도(達島) 사이의 물목에 설치되었던 조선 시대의 수군진이다. 달량의 원래 지명은 달도였는데 완도의 달도와 구분하려고 ‘고달도’라 칭하기도 하였으며 조선 전기에 잠시 해남현에 속한 수군진이었다가 영암으로 이속되었다. 이러한 달량진에 왜구가 침탈한 사건, 곧 달량진 왜변은 1483년(성종 14)·1552년(중종 17) 두 차례 있었다.
1483년 2월 말, 왜선 여러 척이 달량진에 이르러 상선(商船)과 무명 50필, 쌀 30여 석을 약탈하고 3인을 살해하였다.
1522년 6월에는 왜선 12척이 침입하였다가 방어하는 수군에 놀라 달량진에서는 물러났으나 장흥 회령포와 완도 가리포로 쳐들어가 그곳을 난도질하였다.
[을묘왜변]
을묘왜변 은 삼포 왜란 이래 일본에 대한 세견선에 고난을 받아온 왜구들이 1555년(명종 10) 5월에 배 70여 척을 이끌고 달량진을 점령하면서 발생한 커다란 왜변이었다. 당시 달량진성은 왜구에 의해 여러 겹으로 포위당하여, 강진병영의 절도사 원적(元績)과 군졸은 용감히 성위에서 활로 왜구에게 대항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후 달량진을 점령한 왜구는 어란진, 장흥, 강진, 진도 일대를 휩쓸며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때 왜구를 물리치고 영암성을 다시 수복하는 데 양달수, 양달사 형제의 공로가 컸다. 이후 왜구는 1555년 5월 25일 영암 전투를 고비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