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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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梨津倉 |
이칭/별칭 | 남창,영암 남창,고달도창,제주도 제민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변남주 |
[정의]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있었던 조선 시대 영암군 북평종면 지역의 정부 세곡 창고.
[개설]
이진창(梨津倉)이 있었던 지금의 해남군 북평면은 조선 시대에 영암군 북평종면 지역이었으나 1906년 해남군에 편입되었다. 이진창은 지금의 해남군 북일면, 북평면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정부 세곡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창고 조에 의하면 “이진창은 영암에서 남쪽으로 47.17㎞[120리]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1872년 지방 지도』에 의하면 달량진에 영암의 남창으로 그려져 있다. 지금의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마을 달량진성 안에 있었는데 해월루와 북쪽으로 접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시대 남창에 정부 세곡을 보관하였다가 흉년을 대비하는 진휼곡이나 봄철 식량이 곤란한 백성들에게 빌려주었다가 가을철 수확 후 거두어들이는 환곡을 위한 창고였다. 또 특별히 제주도를 출입하는 관리를 접대하는 비용을 충당하거나, 1794년 이후에는 제주도민을 진휼하기 위한 제민창 기능까지 겸하였다.
[관련 기록]
『여지도서(輿誌圖書)』 창고 조를 보면, “이진창은 군의 120리[47.17㎞]에 있다[梨津倉在郡一百二十里].”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誌)』 창고 조를 보면, “이창은 이진에 있다[梨倉梨津]”. 하였다.
[내용]
이진창은 조선 시대 영암군 북평시면과 북평종면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정부의 세곡을 보관하였던 창고였다. 특별히 제주도를 출입하는 관리들의 비용으로 지출하였다. 『정조실록(正祖實錄)』에 의하면, 제주도 세 고을의 수령과 사신이 왕래할 적에 강진·해남·영암이 도회(都會) 차례를 정해서 1년씩 돌아가면서 거행하였다. 그런데 사신이 출입할 때에는 상시 영암의 고달도(古達島)에서 바람을 기다리기 때문에 영암의 경우는 이진창(梨津倉)에 6방을 설치하여 접대를 맡도록 하였다. 고달도 주민들은 상시 고통을 받았으므로 이후에는 영암의 이진, 강진의 남당포, 해남의 관두포에서 번갈아 바람을 기다리고 접대도 해당 고을에서 하도록 하였다.
[변천]
『정조실록』에 의하면, 제주의 백성들을 생각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제민창(濟民倉)을 나주[제창 마을]에 설치하였다. 그런데 나주의 뱃길은 제주도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는 곳이 아니어서 사고가 잦았다. 그러나 조천포(朝天浦)나 화북포 등에서부터 남당도(南塘島)나 고달도(古達島)[이진] 등의 포구까지는 뱃길이 일직선이고, 제주 사람들에게 익숙하므로 침몰될 우려가 없었다. 따라서 나주에 있는 제민창을 고달도에 있는 이진창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진 마을에서 발견되는 많은 현무암들은 제주에서 나올 때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하여 배의 바닥에 실고 나온 것들이다. 이진에서 현무암을 바닷가에 버리고 대신 쌀을 실고 돌아간 증거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북평면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정부 세곡을 저장하였으며, 특별히 제주도를 출입하는 관리들을 접대하는 비용이나 제주도민의 구제곡을 보관했던 특수한 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