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73 |
---|---|
한자 | 全南運動協議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기훈 |
[정의]
1933년 전라남도 영암 지역에서 설립된 사회주의 운동 협의체.
[개설]
혁명적 농민 조합을 결성하여 계급 의식을 고취하고 지역 전위 정치 조직의 기반을 만들고자 한 사회주의자들의 협의체이다. 1933년 5월, 해남과 완도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활동가인 김홍배와 황동윤이 각자 자기 지역에서 활동하다 농민 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 운동을 지도할 기관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하고 전남 운동 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장흥, 강진, 영암 지역에서도 지역 활동가들과 연계하였는데, 영암에서는 최규문, 최기섭 등 영암군 군서면 출신 활동가들이 참여하여 혁명적 농민 조합 건설을 준비하다가 다른 지역 활동가들과 함께 모두 체포되었다.
[설립 목적]
1928년 12월 테제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아래로부터 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은 지역에서 혁명적 대중 조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계급 대중을 조직화하고 지역 전위 정치 조직을 건설하고자 하였는데, 1933년 전남 운동 협의회나 그 후신인 적색 농민 조합 건설 준비 위원회도 계급적 대중 조직인 혁명적 농민 조합 건설을 목적으로 했다.
[변천]
전남 운동 협의회는 1933년 8월 조직을 적색 농민 조합 건설 준비 위원회로 개칭하였다. 이는 마을 단위에서 농민반, 청년반, 소년반, 부녀반을 건설하고 면 단위 농민 조합 지부를 조직하며, 이를 토대로 군 단위 혁명적 농민 조합을 완성하여,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주의 전위 정치 조직을 건설한다는 아래로부터 공산당 재건의 노선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영암군에서는 최규문, 최기섭, 채우동 등 군서면 서구림리 청년들이 1932년 8월부터 마을을 중심으로 동지를 포섭하고 조직을 건설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이들과 연결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1934년 2월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드러나 와해되었으며 사건 관련자가 3천 명, 검거된 자만 558명에 달하는 큰 사건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이들은 합법적인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대중 속으로 파고들 것을 결의하였다. 영암의 활동가들도 야경단, 농촌 진흥회 등 관제 조직 속에서 계급 의식을 고취하는 데 치중하였으며, 마을을 단위로 한 소규모 조직을 만드는 데 치중하였다. 그러나 시작 단계에 그치는 바람에 크게 조직을 확대하지는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최규문은 광주 학생 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로 영보정 사건 이후 다수의 활동가가 구속되어 활기를 잃고 있던 영암 지역 농민 운동에 다시 한 번 활력을 불어 넣었다. 최규문은 해방 이후 지역 정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