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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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彌縣西院鐘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희태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에 있던 영암 고미현 서원에서 종을 주조하였던 사실을 알려 주는 고려 전기의 주종 명문.
[개설]
고미현 서원 종명(古彌縣 西院 鐘銘) 은 영암 고미현의 사찰인 서원에서 주조되었던 서원종(西院鐘)의 종신(鐘身)에 주조 사실을 기록한 명문(銘文)이다. 서원종은 원래 고미현의 서원에서 963년(고려 광종 14)에 주조하여 전해 왔는데 일본으로 흘러가 2013년 현재 히로시마 현[廣島縣] 다케하라 시[竹原市] 쇼렌사[照蓮寺]에서 소장하고 있다.
주종 기문(鑄鐘記文)에 표기된 고미현(古彌縣)은 지금의 영암군 미암면, 학산면, 삼호읍 일대를 부르던 백제 시대 고을의 이름이다. 통일 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에 곤미현(昆湄縣)으로 바뀌었고 고려 시대에도 곤미현으로 계속 지칭하였다. 주종 기문에 표기된 고미현은 고려 시대에 서원종을 만들면서 그 이전의 이름인 고미현을 관례적으로 표기한 듯하다.
고미현[곤미현]의 치소(治所)는 전라남도 영암군 미암면 미암리 향양 마을 부근으로 추정되며, 토성(土姓)은 허(許)·유(臾)·배(裵)·전(田)·종(種)·유(柳)가 기록으로 나타난다.
[형태]
서원종 자체의 크기는 높이 60.7㎝, 둘레 121㎝, 입 지름 41.4㎝ 이다. 종의 둘레에 유곽(乳郭)과 당좌(撞座)[종을 칠 때 망치가 닿는 곳] 등 무늬를 넣은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공간에 명문을 가득 새겨, 명문이 겹치는 줄도 있다고 판단되므로 판독에 주의를 요한다. 내용은 종을 만든 시기와 장소, 종을 만드는 데 관여한 인물로 원주인(院主人) 영현 화상(領玄和尙), 신엄(信嚴) 장로(長老), 효현(曉玄) 상좌(上坐), 흔직(欣直) 경(卿), 예언(乂言) 경, 그리고 제작 기술자인 대박사와 박사 등을 열거하고 있다.
963년 9월 18일에 고미현의 호족으로 추정되는 총규(聰規) 사간(沙干)이 소대왕(昭大王) 즉 광종을 칭송하고자 종을 주조하여 서원에 바쳤다는 내용이 있고, 그 뒤에는 서원의 주지 격인 영현 화상을 비롯한 승려와 지역 유력자로 추정되는 몇몇 인물들의 이름이 이어지고 있다.
고미현 서원 종명 의 판독문은 “소대왕(昭大王)/ 준풍사년계해구월십팔일고미현(峻豊四年癸亥九月十八日古弥縣)/ 서원주종기(西院鑄鍾記)/ 도인명소동원주(徒人名疏同院主)/ 인령현화상신엄(人領玄和尙信嚴)/ 장노효현상좌(長老曉玄上坐)/ 흔직경예언경(欣直卿乂言卿)/ 대백사(大百士)/ 나주지미 벌(羅州只未 伐)/ 백사(百士)/ 당현총규사간(當縣聰規沙干)”으로, 이는 ‘소대왕(昭大王) 준풍(峻豊) 4년[963] 계해년 9월 18일에 고미현(古彌縣) 서원(西院)의 종을 주조한 기록. 무리들의 이름을 적는다. 이 서원의 원주인(院主人)인 영현 화상(領玄和尙), 신엄(信嚴) 장로(長老), 효현(曉玄) 상좌(上坐), 흔직(欣直) 경(卿), 예언(乂言) 경, 대백사(大百士)인 나주 지미(只未) 벌(伐), 백사(百士)인 이 고미현의 총규(聰規) 사간(沙干)’으로 해석된다.
[특징]
고미현 서원 종명 은 고려 시대에 종을 만든 시기와 장소에 이어 종을 만드는 데 관여한 인물로 원주인 영현 화상, 신엄 장로, 효현 상좌, 흔직 경, 예언 경, 그리고 제작 기술자인 대박사와 박사 등을 열거하여 종의 제작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준풍(峻豊)’이라는 고려 광종의 독자 연호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영암 고미현 서원종은 963년에 고미현 서원에서 주종한 종으로, 이때는 고려 광종 14년으로 이른바 광종의 개혁 정치가 한창 진행되던 때였다. 『고려사』 등에 따르면 고려 광종 대에 ‘준풍’이라는 독자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미현 서원 종명은 그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구체적인 기록이라는 점에서 우선 의의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나아가 고미현 서원 종명에는 당시 광종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호족과 승려들의 명단이 나타나고 있어 자료로서의 활용 가치가 있다. 예컨대 앞서 주종 사업의 주도자로 언급하였던 ‘총규 사간’의 경우, 당시 중앙에서 고위 관리로 활약 중이던 영암 출신의 최지몽(崔知夢)과 연관시켜서 음미할 여지가 있다. 최지몽은 처음 이름이 총진(聰進)이었는데,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지역에서 ‘총진(聰進)’와 ‘총규(聰規)’라는 비슷한 이름을 지닌 인물이 나타났다는 것이 우연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