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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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靈巖邑城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고용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9년 6월 3일~2009년 8월 5일 - 영암읍성 터 전남 문화재 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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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영암읍성 터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남풍리|동무리|역리 |
성격 | 성터 |
지정 면적 | 2,010m[읍성 둘레]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남풍리·동무리·역리에 걸쳐 있는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읍성 터.
[개설]
영암읍성이 있는 영암읍 일대는 삼국 시대부터 군현이 설치되어 운영되어 왔던 곳이다. 백제 때 월나군[月奈郡]이었다가 통일 신라 때인 757년에 영암군(靈巖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성종 때는 일시 낭주 안남 도호부(郎州安南都護府)로 승격되기도 하였으며, 1018년(현종 9년)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는 영암군으로 환원되었다. 특히 고려 시대 영암군은 현재의 해남군 화원면 일대의 황원군, 강진군 북부의 도강군 등 2개의 군과 통일 신라 때 반남군에 속해 있던 곤미현(昆湄縣), 해남군 현산면 일대의 해남현(海南縣), 해남군 산이면 일대의 죽산현(竹山縣) 등 3개의 현을 아우르는 전남 서남 해안 일대의 큰 고을[대군(大郡)]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 말 이들 지역에 지방관[감무(監務)]이 파견되어 독립해 나감으로써 조선 시대에는 지금의 영암군과 해남군 송지면[송지부곡] 및 북평면[북평향]을 포함하는 지역을 영역으로 하였다. 조선 후기에 영암면(靈巖面)으로 개편된 후 1979년 영암읍으로 승격되어 2013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변천]
영암읍성은 시굴 조사를 통해 성벽에서 출토된 청자와 기와 조각 등의 유물로 보아 14세기 대의 고려 말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시대 『세종실록(世宗實錄)』과 『금성 일기(錦城日記)』의 기록을 통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1434년(세종 17) 정월 말 함길도와 충청도의 경우 축성군(築城軍)으로서 도망한 자는 모두 규율에 따라 처벌하였으나, 전라도에서는 그 일수에 따라 돈으로 징수하였다. 이에 의금부 도사 민건(閔騫)에게 현지에 가서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 사건에 영암읍성이 관련되었다. 『금성 일기』에 사건의 전말이 전하고 있다. 당시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영암읍성을 넓혀 쌓는[퇴축(退築)] 과정에서 도망간 축성군과 부역 군인 중 처음 도망가자고 주도한 자와 역군을 통솔하는 패두(牌頭)와 통주(統主)를 조사하는 일로 2월 12일 민건이 나주에 도착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퇴축(退築)은 성을 확장하는 개념의 용어로 영암읍성은 고려 말에 처음 건립된 이래 그동안 늘어난 인구에 맞추어 대대적으로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농사철과 추수기를 피하여 읍성의 축조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실제 영암읍성을 넓혀 쌓는 작업은 그 전 해인 1433년(세종 16) 가을 추수가 지난 다음의 동절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사건에 대한 실태 파악과 처리 기간 등을 감안하더라도 흉년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읍성의 축조 기간이 2~3개월 정도 소요되었던 점으로 보아 1434년에는 영암읍성의 성벽을 비롯하여 치, 여장, 성문 등의 주요 시설에 대한 공사를 마쳤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 점은 1451년(문종 1) 8월 충청도·전라도·경상도 도체찰사 정분(鄭苯)이 하삼도 읍성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직접 현지를 방문하여 실사를 진행한 후 보고한 내용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즉, 영암읍성은 성문 앞에 설치되는 옹성(甕城)과 성벽 바깥쪽에 시설하는 해자를 제외한 성벽, 여장, 치, 성문, 우물 등을 이미 갖추고 있었으며, 고치지 않고 그대로 완성시킬 대상으로 분류되었다. 여기에서 완성시킬 대상은 옹성과 해자였다. 이 시설들은 순천읍성과 광양읍성의 예에서 보듯이 정분이 현지 읍성에 대한 실태 파악을 끝낸 이듬해인 1452년(단종 원년) 8월에 해당 고을에서 완공하도록 조치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영암읍성도 이 무렵을 전후하여 완공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영암읍성은 고려 말에 처음 축조되었으며, 1433년 겨울 읍성의 확장 공사에 착수하여 그 이듬해 옹성과 해자 등을 제외한 주요 시설을 완공하였고, 옹성과 해자는 1452년 무렵에 완공하여 영암읍성의 전체적인 틀을 갖추었다.
영암읍성의 규모는 1451년에 처음 파악되었다. 성벽 둘레가 4,369척, 높이는 평지부가 12척, 높고 험한 곳[高險處]이 9척이었다.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인 여장(女墻)은 639개로 높이는 3척이었다. 부대시설로는 적군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구조물인 치[敵臺]가 6개소, 성문은 3개소인데 성문 앞의 옹성은 당시까지 축조되지 않았으며, 성 바깥의 해자도 파지 않았다. 그리고 읍성 안에 샘 2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성벽의 둘레를 포백척 준수(布帛尺 遵守)[46.73㎝]로 환산한 수치[2,041m]와 실측한 수치[2,010m] 간의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이후 성벽의 둘레에는 변화가 없었다. 또한 성벽의 높이 가운데 높고 험한 곳은 지형 조건으로 보아 산 능선을 통과하고 있는 북벽 구간으로 9자 높이로 쌓았고, 나머지 구간은 모두 구릉 또는 평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12자 높이로 쌓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뒤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영암읍성이 석성으로 둘레가 4,369척, 높이가 15척, 성 안에 4개의 우물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성벽의 높이는 체성(體城)과 여장의 높이를 더한 규모로 파악되고, 우물만 2개 더 늘었을 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또한 『여지도서』에서도 영암읍성이 석성으로 둘레 4,369척, 높이 15척으로 기록되어 동일하고, 여장의 수만 1,025개로 386개가 늘어난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읍성 안에 연못 2개소가 새롭게 굴착되고, 우물 수는 4개로 같았다. 여장은 성벽의 둘레에 변화가 없기 때문에 그동안 훼손된 것을 새로 쌓으면서 길이를 줄여 축조한 결과로 여겨진다.
[위치]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남풍리·동무리·역리에 걸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86년에 목포 대학 박물관의 지표 조사 때 확인되었고, 1999년에 목포 대학교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를 작성할 때 다시 확인되었다. 2009년 6월 3일부터 2009년 8월 5일까지 전남 문화재 연구원에서 동벽 구간[남풍리 63번지 외] 34,300㎡에 대해 시굴 조사를 실시하여 성벽의 축조법을 파악하는 한편 치와 해자 등 부대시설의 일부도 조사하였다.
[현황]
영암읍성은 북쪽 구간을 제외하면 해발 40m 전후의 평지성 구릉 상에 위치하는 평산성(平山城)으로 고려 시대 이후 읍성의 일반적인 입지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전체 성벽의 둘레는 시굴 조사에서 확인된 성벽과 지표상 드러난 성벽 부분을 측량한 결과 2,010m로 확인되었다. 현재는 북서쪽 성벽의 일부가 지표상에 드러나 있을 뿐 대부분 붕괴되거나 개발로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가운데 2009년 전남 문화재 연구원에 의해 동벽 구간의 체성부 약 190m와 치 및 해자 등 부속 시설의 일부가 조사됨으로써 성벽의 축조법을 비롯하여 부속 시설의 구조와 양상이 파악되었다.
성벽은 외벽을 돌로 쌓고 내벽은 흙으로 경사지게 덮어 처리한 내탁식(內托式)으로 조선 시대 전형적인 읍성의 축조 기법에 따라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구조는 외축부, 할석재의 뒷채움부, 흙으로 된 내탁부로 구분된다. 외벽 높이 120~210㎝, 내벽 높이 320㎝가 남아 있었으며, 너비는 뒷채움부 너비 470~560㎝, 내탁부 너비 500㎝로서 외벽 면석을 포함한 총 너비는 10~11m이다.
치(雉)는 문헌 기록에는 총 6곳이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가운데 1기가 부분적으로 조사되었다. 길이 810㎝, 높이 115㎝ 정도이나 부분적인 조사로 너비는 파악되지 않았다.
해자(垓字)는 체성부 기저부에서 약 15~27m 정도 거리에 설치되었는데 다른 읍성의 해자가 7~10m인 데 비해 2~3배가량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폭은 약 400~600㎝로서 구릉 상에 시설하였기 때문에 호안 석축(護岸石築)[둑을 수해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시설]이 없는 외황(外隍)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출토 유물은 9세기 통일 신라 때 토기 조각이 소량 확인되었으나, 대부분은 14~16세기로 편년되는 기와 조각 및 자기 조각, 옹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상대적으로 많이 확인된 인화(印花)와 박지(剝地) 기법 분청사기를 통해 볼 때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초반까지의 유물이 중심을 이룬다. 이외에도 조선 시대 전 시기에 걸친 유물 등이 출토됨으로써 영암읍성의 존속 기간을 말해 준다.
[의의와 평가]
영암읍성은 전라남도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읍성 가운데 나주읍성과 광주읍성에 이어 세 번째로 조사된 읍성에 해당한다. 이들 읍성들의 경우 성문 등 특정 유구의 조사에 치우친 조사였던 반면에 영암읍성은 성벽과 해자 및 치 등 부속 시설이 함께 조사되었다는 데 학술적인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영암읍성은 시굴 조사 통해 고려 말 처음 축조된 이래 15세기 전반의 개축 공사를 통해 확장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읍성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대형 급에 속하는 읍성이라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와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