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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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希信 |
이칭/별칭 | 경립(景立),송와(松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소산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곽아람 |
[정의]
조선 시대 영암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이천(利川) 혹은 남평(南平), 자는 경립(景立), 호는 송와(松窩)이다. 판윤(判尹)을 지낸 서숙명(徐叔明)의 증손자이며, 아버지는 서홍필(徐弘弼)이다.
[활동 사항]
서희신(徐希信)[1542~?]은 1567년(선조 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41세 때인 1582년(선조 15)에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6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박사(博士)를 거쳐 단양 군수(丹陽郡守)를 지냈다. 1594년 흉년이 들었을 때 은계 찰방(銀溪察訪)으로 있던 서희신은 상수리 열매가 굶주린 백성들에게 요긴하다는 글을 비변사에 올려 임금으로 하여금 도토리 구제법을 실행하게 하였다. 서희신은 광해군 시기 「신명사기(神明舍記)」를 짓고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물러났다. 후에 조정에서 북평사(北評事)를 제수하고 부르니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서희신은 「공명 폐사가(功名獘屣歌)」와 「신명사기(神明舍記)」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