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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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圭昌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윤미 |
[정의]
일제 강점기에 항일 학생 결사인 성진회에서 활동한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규창(崔圭昌)[1908~1949]은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독립운동 당시 주소는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東鳩林里)였다. 1926년부터 광주 비밀 결사 모임인 성진회(醒進會)에서 활동하면서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고, 고향인 영암에서 소작 쟁의를 주도하였다.
[활동 사항]
최규창은 광주 고등 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 11월 당시 광주에 있던 자신의 하숙방에서 광주 고등 보통학교 및 광주 공립 농업 학교[현재의 광주 자연과학 고등하교] 학생 15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 노예 교육 체제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 학생 결사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였다. 성진회는 “일제의 기반에서 한국의 독립을 쟁취한다, 일제의 식민지 노예 교육을 절대 반대한다,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요구한다.”라는 것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1927년 3월에 성진회는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시 광주 경찰서의 형사와 혈연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 회원을 배제하려고 자발적으로 해산하였다. 그 후 성진회는 비밀리에 각 학교 단위별로 활동을 하였다.
1928년 2월 최규창은 광주 지방 청년 운동의 지도자인 강해석(姜海錫), 지용수(池龍洙)의 지도 아래 임주홍, 김광용, 문승수, 정종석, 김인수, 주당석, 유치오, 하의철, 이동선, 박무길, 정귀석, 임무근 등과 함께 모임을 갖고서 조선의 독립 연구와 사회주의 연구를 결의하였다. 최규창은 광주 고등 보통학교의 동맹 휴학을 주도하고 독립 선언의 격문을 살포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1928년 10월 5일에는 광주 지방 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규창은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성진회와 관련하여 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1930년 10월 광주 지방 법원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고 항소한 결과 1931년 6월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최규창은 미결 기간 중에도 치열한 옥내 투쟁을 벌여 민족 의식을 과시하였다.
출옥 후 고향 영암으로 돌아온 최규창은 일본의 통치 기반에서 이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암 농민 운동 협의회를 조직하였고, 농민 계몽과 문맹 퇴치를 위하여 야학을 설치하여 농촌 지도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또한 일본인과 친일파 악덕 지주에 맞서 소작 쟁의를 일으켜 농민의 이익 옹호와 항일 투쟁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다시 일경에 체포된 최규창은 1933년 9월 29일 광주 지방 법원 목포 지청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최규창의 공훈을 기려 1982년에 건국 포장을,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