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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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端宗復位運動 |
영어공식명칭 | Danjong Restoration Movemen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백지국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457년 - 단종복위운동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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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457년 - 단종복위운동 실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57년 - 단종복위운동 단종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57년 - 단종복위운동으로 금성대군 처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57년 - 단종복위운동으로 이보흠 처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457년 - 순흥도호부 폐부 |
발생|시작 장소 | 단종복위운동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
종결 장소 | 단종복위운동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
성격 | 복위운동 |
관련 인물/단체 | 단종|금성대군|이보흠 |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지역에서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주도한 단종 복위를 위한 운동.
[개설]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은 1457년(세조 3) 순흥도호부에 위리안치된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도호부사 이보흠(李甫欽)이 향민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실패한 사건이다. 단종복위운동으로 말미암아 금성대군, 이보흠, 단종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또한, 단종복위운동의 주 무대였던 순흥도호부는 혁파되고, 순흥도호부의 영역은 인근 군현으로 분산되었다.
[역사적 배경]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首陽大君)은 1455년 결국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에 이징옥(李澄玉)의 난, 사육신사건(死六臣事件) 등 세조에 대한 반발이 조정 안팎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금성대군과 순흥도호부사 이보흠이 중심이 된 단종복위운동도 이러한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금성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 번째 아들도 태어났다. 1437년(세종 19)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이방번(李芳蕃)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단종이 즉위하자 어린 임금을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삭녕으로 유배되었다가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1456년(세조 2) 사육신사건으로 경상도 순흥도호부에 위리안치된다.
이보흠은 1429년(세종 11)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사창법」 시행을 건의하여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4년에는 기주관으로서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57년 순흥도호부사로 부임하였다. 순흥에 위리안치되었던 금성대군과 새로 부임한 순흥도호부사 이보흠은 왕위 찬탈이라는 격동기 순흥에서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준비하게 된다.
[경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1457년(세조 3)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만나기만 하면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금성대군이 산호 갓끈을 이보흠에게 주고 거사를 꾀하여 비밀리에 남쪽 인사들과 결탁하여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하였다. 하루는 주변 사람을 물리고 이보흠을 불러서 격문을 작성하게 하였는데,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명령하니, 누가 감히 쫓지 않으랴”라는 한 구절만 전해진다.
그들은 순흥의 군사와 남쪽의 모의에 참여한 자를 발하여 노산(魯山)[단종]을 맞아서 계립령을 넘어 순흥에 옮겨 모시고 영남을 호령하여 조령과 죽령의 두 길을 막고서 복위할 계책을 세웠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보면 1457년 6월 27일 안동의 관노 이동(李同)이 판중추원사 이징석(李澄石)을 통해 금성대군이 순흥도호부에서 몰래 군소배와 결탁하여 불궤한 짓을 도모한다며, 명주 띠[주대(紬帶)]를 바치며 고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단종복위운동에 대해 조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세조는 이증(李璔), 한명회(韓明澮)에게 증거를 살펴보게 하고 윤자(尹慈)를 순흥에 보내 관련된 사람을 국문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보흠은 역모자로 고발되지 않고 오히려 세조에게 직접 계를 올려 금성대군이 역모를 꾀하였다고 보고하였다는 점이다. 이 기록을 보면 이보흠은 변절자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기록을 비교해 보면 모순되는 점이 발견된다. 당시 기록은 세조와 관련된 사람들이 남긴 것이므로 이보흠에 대한 면밀한 사료 비판이 요구된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처음에는 금성대군과 여기에 협조한 순흥도호부 지역 향리 및 사족들만 문초를 당했으나, 여러 신하의 탄핵으로 이보흠도 체포되었고, 문초 끝에 이보흠의 공모가 드러났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처음 관노가 한양에 고변하려고 하자 이보흠이 사람을 시켜 먼저 고변을 했고, 이어 말을 타고 직접 한양으로 올라가 고변해서 자수한 것으로 죄를 면하려고 했지만, 결국 격문을 초안한 것 때문에 체포된 것이라고 하였다.
[결과]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단종복위운동의 주동자로 대신들과 종친들의 주청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 역시 유배지에 생을 마감하였다. 단종복위운동의 중심 무대였던 순흥도호부도 폐부(廢府)되고 그 영역은 인근 영천군과 풍기군 등지에 분속되었다.
200여 년이 지난 1681년(숙종 7) 단종이 신원되면서 대군(大君)에 추봉되었으며, 1698년(숙종 24)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혁파되었던 순흥도호부 역시 1683년(숙종 9) 복설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속에 1719년(숙종 45) 순흥도호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숙종의 허락을 받아 그 유허지에 금성대군 신단을 설치하였다.
[의의와 평가]
단종복위운동은 옛 영주 지역 선비들의 충절과 절의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