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5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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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云敬 |
영어공식명칭 | Jeong Un-gyeong |
이칭/별칭 | 염의(廉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위은숙 |
출생 시기/일시 | 1305년 - 정운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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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326년 - 정운경 사마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330년 - 정운경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331년 - 정운경 상주목사록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32년 - 정운경 전교교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39년 - 정운경 삼사도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40년 - 정운경 통례문지후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41년 - 정운경 전의주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42년 - 정운경 홍복도감판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43년 - 정운경 복주목판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45년 - 정운경 삼사판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46년 - 정운경 서장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47년 - 정운경 전교부령 직보문각지제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48년 - 정운경 양광도안렴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49년 - 정운경 교주도안렴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50년 - 정운경 전의부령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51년 - 정운경 전법총랑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52년 - 정운경 전주목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56년 - 정운경 병부시랑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58년 - 정운경 지형부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59년 - 정운경 형부상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363년 - 정운경 검교밀직제학 보문각제학 상호군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366년 - 정운경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32년 - 정운경 문계서원 제향 |
거주|이주지 | 정운경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431 |
수학지 | 정운경 수학지 - 경상북도 영주시 명륜길 76[하망동 167] |
부임|활동지 | 정운경 부임지 - 경상남도 밀양시 |
부임|활동지 | 정운경 부임지 - 전라북도 전주시 |
묘소|단소 | 정운경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산69-2 |
사당|배향지 | 문계서원 -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 |
사당|배향지 | 모현사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로 229-38[신암리 1259-2]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봉화(奉化) |
대표 관직 | 전교교감|밀성군지사|형부상서 |
[정의]
고려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정운경(鄭云敬)[1305~1366]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1342~1398]의 아버지로 전교교감, 밀성군지사, 형부상서 등을 지냈으며, 청백리로 명성이 높았다.
[가계]
정운경의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봉화현호장 정공미(鄭公美), 할아버지는 비서랑동정 정영찬(鄭英粲), 아버지는 검교군기감 정균(鄭均)이며, 부인은 당시 영주 지역의 사족이었던 산원 우연(禹淵)의 딸 단양우씨(丹陽禹氏)이다. 아들은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 참판 정도존(鄭道存), 한성판윤 정도복(鄭道復)[1351~1435]이며, 사위는 공조판서를 지낸 황유정(黃有定)[1343~?]이다.
[활동 사항]
정운경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이모 집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 영주향교와 안동향교에서 학문을 익혔고, 외삼촌 안분(安奮)을 따라 개경으로 가서 12도(十二徒)와 교류하였는데, 이때부터 7세 연상의 이곡(李穀)[1298~1351]과 교제하기 시작하였다. 1326년(충숙왕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330년 문과에 급제하여, 1331년 상주목사록에 임명되었다. 1332년(충혜왕 2) 전교교감, 1338년(충숙왕 복위 7) 주부에 올랐다. 이때 정운경은 접반사가 되어 원나라에서 온 어향사(御香使)를 맞이하게 되었다. 어향사가 공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기생을 데리고 오자, 정운경은 기생을 꾸짖어 밖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어향사가 화를 내자 정운경은 어향사를 추하게 여기고 사직하였다.
정운경은 1339년 삼사도사, 1340년(충혜왕 복위 1) 통례문지후, 1341년 전의주부, 1342년 홍복도감판관을 거쳐, 1343년 밀성군지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재상이었던 조영휘(趙永暉)가 공문을 보내 자신에게 빚을 진 밀성 사람의 돈을 대신 받아달라고 하였으나 부당한 요구라며 묵살하였다. 1343년 복주목판관으로 옮겼는데, 정실에 얽매이지 않고 송사를 현명하게 잘 처리했다고 한다.
정운경은 1345년(충목왕 1) 삼사판관에 임명되었고, 1346년 서운부정이 되었으며, 1347년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7년 성균사예와 전교부령 직보문각지제교를 거쳐, 1348년 양광도안렴사, 1349년 교주도안렴사로 부임하였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고을의 기강이 엄숙하게 섰다고 한다. 1350년(충정왕 2) 전의부령, 1351년 전법총랑에 올랐다. 1352년(공민왕 1) 전주목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전주 지역에는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정운경이 지혜를 발휘하여 범인을 가려내었다. 1356년 병부시랑을 맡아 공평한 잣대로 무반을 뽑았다. 1357년 9월 서해도찰방에 임명되었다.
정운경은 1357년(공민왕 6) 비서감 보문각직학사를 거쳐, 존무강릉 겸 삭방도채방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삭방도는 여진족의 침입을 오랫동안 받아 피폐해져 있었는데, 정운경이 진무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1358년 지형부사를 맡아 송사를 공평하게 하였고, 1359년에는 형부상서로 승진하였다. 1363년 검교밀직제학 보문각제학 상호군에 임명되었다.
[묘소]
정운경의 묘소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운경은 청백리로 명성이 높았다. 이에 친우들이 ‘염의(廉義)’라는 사시(私諡)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1832년(순조 32) 문계서원(文溪書院)[봉화군 상운면 문촌리]에 제향되었다. 문계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고 이후 복설되지 않았다. 1922년 정운경의 후손들이 묘소 아래에 모현사(慕賢祠)[영주시 이산면 신암리]를 짓고 위패를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