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5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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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琴是調 |
영어공식명칭 | Geum Si-jo |
이칭/별칭 | 경평(景平),신암(新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감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87년 - 금시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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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2년 - 금시조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금시조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47년 - 금시조 영해부사 재임 |
몰년 시기/일시 | 1668년 - 금시조 사망 |
부임|활동지 | 금시조 부임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
묘소|단소 | 금시조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봉화(奉化) |
대표 관직 | 영해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금시조(琴是調)[1587~1668]는 문과 급제 후 영해부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가계]
금시조의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경평(景平), 호(號)는 신암(新巖)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금원수(琴元壽), 할아버지는 진사 금인(琴軔)[1510~1593], 아버지는 생원 금복고(琴復古)[1549~1632], 어머니는 남계홍(南繼洪)의 딸 영양남씨(英陽南氏)이다. 부인은 사복시정을 지낸 김윤안(金胤安)의 딸 선성김씨(宣城金氏)이다. 아들이 없어 동생 금시해(琴是諧)의 셋째 금성달(琴聲達)에게 후사를 잇게 하였다.
[활동 사항]
금시조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해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증광시 생원으로 입격하였고, 1624년(인조 2)에 식년시 병과(丙科)로 등과하면서, 본격적인 사환의 길로 들어섰다. 네 곳의 수령을 역임한 이후 품계가 통훈대부에 이르렀고, 이후 봉상시첨정과 춘추관을 겸직하였다. 광해군 재위 때에는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1647년(인조 25) 영해부사로 재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금시조의 후손인 금칠현(琴七絃)이 1966년 금시조의 유문을 모아 『신암집(新巖集)』을 간행하였다.
[묘소]
금시조의 묘소는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