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400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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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亻+政 |
영어공식명칭 | Kim Jeong |
이칭/별칭 | 사달(士達),노봉(蘆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670년 - 김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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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96년 - 김정 진사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96년 - 김정 오록리 이거 |
활동 시기/일시 | 1708년 - 김정 식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12년 - 김정 함경도도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23년 - 김정 옥천군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25년 - 김정 강릉대도호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28년 - 김정 이인좌의 난 창의 |
활동 시기/일시 | 1728년 - 김정 양무원종공신 1등 녹훈 |
활동 시기/일시 | 1728년 - 김정 강계도호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730년 - 김정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735년 - 김정 제주목사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737년 - 김정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93년 - 노봉김선생흥학비 건립 |
출생지 | 학사정사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 |
거주|이주지 | 김정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 |
거주|이주지 | 김정 거주지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 |
수학지 | 도산서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도산서원길 154] |
부임|활동지 | 김정 부임지 - 충청북도 옥천군 |
부임|활동지 | 김정 부임지 - 강원도 강릉시 |
부임|활동지 | 김정 부임지 - 평안북도 강계군 |
부임|활동지 | 김정 부임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묘소|단소 | 김정 묘소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
사당|배향지 | 오천서원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
사당|배향지 | 영혜사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풍산(豊山) |
대표 관직 | 경성판관|강계도호부사|제주목사 |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정(金亻+政)[1670~1737]은 경성판관·강계도호부사·제주목사 등을 지낸 문신이다.
[가계]
김정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달(士達), 호는 노봉(蘆峰)이다. 아버지는 비변랑을 지낸 김휘봉(金輝鳳)[1643~1683], 어머니는 참봉을 지낸 금성휘(琴聖徽)[1622~1682]의 딸 증 숙부인 봉화금씨(奉化琴氏), 할아버지는 증 이조참의 김시행(金時行), 증조할아버지는 한성부우윤을 지낸 김응조(金應祖)[1587~1667]이다. 부인은 김학재(金學載)의 딸 숙부인 의성김씨(義城金氏)와 충의위 이망우(李望雨)의 딸 숙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이다.
[활동 사항]
김정은 1670년(현종 11) 영천군(榮川郡) 학사정사(鶴沙精舍)[지금의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에서 출생하였다. 16세 때 성문하(成文夏)[1638~1726]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고, 도산서원에서 『주역(周易)』을 공부하였다. 1696년(숙종 22)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1696년 겨울 영천군 오록리[지금의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로 이거 하였다. 1708년(숙종 34) 식년시 문과 급제 후 내섬시직장·서빙고별제·사헌부감찰 등에 제수되었다. 1712년 함경도도사로 부임하였으며, 임기를 마친 후에는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김정은 1723년(경종 3) 옥천군수로 부임하였다. 1724년 옥천군에서 큰 화재가 일어나 민가 600여 호와 관청 건물 등이 불타고 많은 재산 피해를 보았는데, 1년 만에 모두 복구하였다. 1725년(영조 1) 이조판서 민진원(閔鎭遠)[1664~1736]이 유배지에서 돌아오다가 이 소식을 듣고 영조에게 보고하니, 영조가 특별히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다. 김정은 1725년 강릉대도호부사로 부임하였는데, 백성들이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고 세금을 탕감해 주었으며, 1726년 큰 흉년이 들자 곡식 300석을 풀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나학천(羅學川)[1658~1731]·장후상(張后相)[1677~1742] 등 고향 선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김정은 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양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728년 강계도호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인삼을 공납으로 바치는 것을 비롯해 고을의 폐단 50여 가지를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이것이 다시 조정에 알려지게 되고, 영조는 이를 칭찬하며 김정에게 의복과 잘 훈련된 말을 하사해 주었다. 1730년 의주 복정선(卜定船)[토산물을 운반하는 배]의 밀매 문제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하고, 의금부의 조사를 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1731년 고향으로 돌아온 김정은 노봉정사(蘆峰精舍)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김정은 1735년(영조 11)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제주목에서 김정은 사비를 털어 삼천서당(三泉書堂)과 존현당(尊賢堂)을 짓고 학문을 진작시켰다. 또 제주도의 입구인 화북포가 협소하여 불편함이 크므로, 군정을 동원하고 사비를 털어 증축하였다. 어사 이도원(李度遠)[1684~1742]이 장계를 올려 김정의 치적을 영조에게 보고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청백리에 녹선하려고 했지만 반대하는 신하들 때문에 이루지 못하였다. 김정은 1737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기 위하여 후풍관(候風館)에서 배를 기다리다 병을 얻어 후풍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김정의 문집으로 4권 2책의 『노봉집(蘆峰集)』이 전한다.
[묘소]
김정의 묘소는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정은 오천서원(梧川書院)과 영혜사(永惠祠)에 제향되었으나, 두 곳 모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1893년(고종 30)에는 제주도의 백성들이 김정의 치적을 기리기 위하여 지금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동에 ‘노봉김선생흥학비(蘆峯金先生興學碑)’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