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0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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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端宗 流配地- 歷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용철 |
[정의]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의 유배 과정과 유배지 개관.
[개설]
단종(端宗)[1441~1457]은 이름이 이홍위(李弘暐)이고, 조선 제5대 임금 문종(文宗)[1414~1452]의 외아들이다. 1441년(세종 23) 7월 23일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에서 현덕왕후(顯德王后) 소생으로 출생하였다. 1448년(세종 30)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450년(세종 32) 7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452년(문종 2) 5월 18일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선왕인 문종은 유명(遺命)으로 김종서(金宗瑞)[1383~1453], 황보인(皇甫仁)[?~1453] 등에게 단종의 보필을 명하였지만,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을 중심으로 한 왕실 종척의 반발로 인하여 왕위를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세종(世宗)[1397~1450]의 둘째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였던 수양대군은 신권의 지나친 강화와 왕권의 약화에도 불만을 갖고 있었고, 또한 자신의 야심을 이기지 못하고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 하였다. 그 결과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황보인 등 신권을 대표하는 세력을 제거하였으며, 또 자신에 반대하는 대군 중 가장 큰 경쟁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마저 강화로 축출한 뒤에 사사(賜死)하였다. 이후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 여러 중직을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하였다.
그 결과 단종은 왕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수양대군의 압박으로 인하여 자신을 보위하던 측근마저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 단종은 수양대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455년 윤 6월, 의금부에 명하여 혜빈 양씨(惠嬪 楊氏)를 청풍(淸風)으로, 상궁 박씨를 청양(靑陽)으로, 금성대군(錦城大君)[1426~1457]을 삭녕(朔寧)으로, 한남군(漢南君)[1429~1459]을 금산(錦山)으로, 영풍군(永豊君)[1434~1456]을 예안(禮安)으로, 정종(鄭悰)[?~1461]을 영월로 각각 귀양 보냈다. 또 조유례(趙由禮)는 고신(告身)을 거둔 뒤 가두고, 이어서 6월 19일에는 금성대군을 광주(廣州)로 이배하였다. 그리고 결국에는 수양대군 일파의 겁박에 의하여 선위를 결정하고, 1455년(단종 3) 윤 6월 11일 경회루에서 수양대군에게 대보(大寶)를 전달하고 양위하고 말았다.
단종의 선위는 충성심 깊은 신하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특히 세종과 문종으로부터 단종의 보필을 당부 받은 신하들은 세조(世祖)[1417~1468]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추진하였다. 때마침 세조는 상왕[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이에 성삼문(成三問)[1418~1456], 박팽년(朴彭年)[1417~1456], 하위지(河緯地)[1412~1456], 이개(李塏)[1417~1456], 유성원(柳誠源)[?~1456], 김질(金礩)[1422~1478], 권자신(權自愼)[?~1456] 등은 환영장의 운검(雲劍)으로 선정된 성승(成勝)[성삼문의 부친]과 유응부를 통하여 그 자리에서 세조와 그 측근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1456년 6월 1일 명나라 사신 환영식이 개최되었다. 하지만 계획이 갑자기 변경되어 환영장에 운검을 배치하지 않게 되면서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은 실패로 돌아갔다. 같이 계획을 세웠던 김질이 세조에게 이 사실을 고변하면서 운동이 좌절된 것이다. 그 결과 성삼문을 포함한 연루자들은 큰 화를 당하였으며, 단종 역시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淸泠浦)로 안치된 것이다.
결국 단종은 1456년(세조 2) 6월 22일 한양에서 400여 리[약 157㎞]나 떨어진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단종은 어린 나이임에도 유뱃길에서 군주로서의 의연함을 보이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유뱃길은 순탄치 만은 않았다. 단종은 낡은 남여를 타고 종로를 지나 동대문으로 나가면서 자신을 전별하다가 관노에게 봉변을 당하는 백성들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또 단종은 종묘에서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위패가 불태워지는 광경을 목도하고 조석을 폐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귀양 행렬은 한양을 출발하여 광주, 여주, 원주, 부론, 주천을 거쳐 한양을 떠난 지 7일 만인 1456년 6월 28일 영월 청령포 적소(謫所)에 도착하였다.
청령포는 영월에서 남서쪽으로 대략 3㎞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청령포의 지형을 보면 동·남·북 삼면(三面)이 깊은 강물로 막혀 있는데, 그 각각이 남한강(南漢江)의 지류인 서강(西江), 동강(東江), 금강(錦江)이었다. 또한 서쪽은 66개나 되는 산봉우리로 막혀 있었다. 이로 인하여 청령포는 나룻배로 강을 건너지 않는 한 절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는 곳이었다.
청령포의 단종 처소는 세 채의 뒤방집으로 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단종은 그중 한 채에서 장지를 사이로 하고 궁녀와 같이 거처하였고, 남은 집에는 단종을 지키는 군졸들이 살았는데, 군졸 20명, 궁노 10명, 눈을 피하여 뒤쫓아 온 궁녀 6명, 내시 1명 등 모두 40여 명에 가까운 인원이 함께 살았다. 당시 세조는 이 일을 알았지만 굳이 막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종을 따르는 이들은 궁녀와 궁노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남몰래 맑고 시원한 냇물을 떠다 올렸고, 어떤 이는 산딸기를 따다 바쳤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밤중에 모깃불을 피워 놓기도 하였다.
단종은 청령포에서 거처하는 동안 매일같이 뒷산에 올라가 고궁을 그리며 산기슭에 흩어진 돌을 주워 탑을 세웠다. 이 탑이 지금의 망향탑인데, 망향탑은 그 후 300여 년간 잘 보존되다가 근래 허물어졌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974년 군수 김명한(金明漢)의 주선으로 다시 복원된 것이다. 청령포 서쪽에는 노산대(魯山臺)라는 곳이 있는데, 유배 후 슬픔에 잠긴 단종이 한양궐 방향을 바라보며 해질녘 시름을 삭이던 약 80m 높이의 낭떠러지이다. 참고로 노산대라는 이름은 임금에서 폐위된 단종의 군호(君號)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노산대에서 청령포 쪽을 바라보면 수령이 600년이 넘었다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1988년 4월 30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영월 청령포 관음송(觀音松)이다. 영월 청령포 관음송이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소나무라는 설이 있었다. 또한 영월 청령포 관음송 이름의 유래도 흥미롭다. 영월 청령포 관음송 소나무가 유배 온 단종의 처절한 생활을 직접 보았다고 하여 볼 ‘관(觀)’ 자에, 너무나 애절한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하여 ‘음(音)’ 자를 붙여 ‘관음송’이라 명명(命名)하였다는 것이다. 이외 청령포를 에두르고 있는 강 건너 나루터의 왼쪽에는 단종의 유뱃길을 호위하였고, 이후 사형 집행의 어명을 수행하려고 왔던 의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고 돌아가면서 비통한 심경을 읊은 시조가 기록된 왕방연 시조비가 있다. 왕방연의 시조는 본래 구전되어 오던 것을 1617년 김지남(金止男)[1559~1631]이 한시로 엮은 것인데,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통하여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시조의 내용을 보면,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이다. 이 밖에 청령포에 있는 단종에 관한 유적으로는 ‘금표비(禁標碑)’와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가 있다. 모두 영조(英祖)[1694~1776]가 단종의 넋을 위로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금표비는 1726년(영조 2) 단종이 세상을 떠난 지 270년 뒤에 세운 것인데, “동서로 300척(尺), 남북으로 490척은 임금이 계시던 곳이므로 뭇 백성은 들어오지 말지어다.”라는 출입금지 푯말이다. 비석 앞면에 ‘청령포금표(淸泠浦禁標)’라고 씌어 있다. 단묘유지비는 단종이 머물렀던 옛 집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1736년(영조 39)에 어명으로 원주 감영에서 세운 것이다. 비문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고 씌어 있는데, 이는 ‘단종 임금이 여기 계셨던 때의 옛터’라는 의미이다.
청령포에서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내던 단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가을 홍수를 만나면서 청령포를 떠나 관풍헌(觀風軒)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관풍헌은 1428년(세종10) 영월군수 김복항(金福恒)이 건립하였으며, 영월군의 관청으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관풍헌으로 옮긴 이듬해인 1457년부터는 관가의 감시도 다소 완화되었다.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는 다소간 연민의 정을 느꼈고, 이런 맥락에서 강원감사 김광수(金光粹)에게 명하여 단종을 후하게 대우하라고 지시한 가운데 내시부 우승지 김정(金精)을 영월에 파견하여 안부를 확인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 덕분에 단종의 관풍헌 생활은 짧으나마 비교적 평온하였다. 단종은 마음이 산란하거나 심사가 울적할 때 퉁소 부는 이를 데리고 관풍헌 앞 매죽루(梅竹樓)에 올라 달을 바라보면서 퉁소 소리로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매죽루는 원래 1431년(세조 13)에 영월군수인 신권근(申權根)이 짓고 그 누각 이름을 ‘매죽루(梅竹樓)’라 하였는데, 단종이 매죽루에 올라 자신을 소쩍새[자규(子規)]와 같은 슬픈 한을 지닌 처지를 빗대어 시를 지었다 하여서 후대에 ‘자규루’라고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단종이 지은 「자규시(子規詩)」와 「자규사(子規詞)」는 현재 『장릉지(莊陵誌)』를 통하여 전하여지고 있다.
「자규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자원금출제궁(一自寃禽出帝宮)[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고신척영벽산중(孤身隻影碧山中)[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가면야야면무가(假眠夜夜眠無假)[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은 이룰 수 없고]/ 궁한년년한불궁(窮恨年年恨不窮)[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성단효잠잔월백(聲斷曉岑殘月白)[자규 소리도 끊긴 새벽 묏부리 달빛만 희고]/ 혈류춘곡낙화홍(血流春谷落花紅)[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떨어진 꽃이 붉구나]/ 천롱상미문애소(天聾尙未聞哀訴)[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하내수인이독청(何乃愁人耳獨聽)[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한편 「자규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월백야촉혼추(月白夜蜀魂啾)[달 밝은 밤 소쩍새는 슬피 우는데]/ 함수정의류두(含愁情依榴頭)[수심에 젖어 누각에 기대어 있으려니]/ 이제비아문고(爾啼悲我聞苦)[네가 슬피 울어 듣는 나도 괴롭구나]/ 무이성무아수(無爾聲無我愁)[네가 울지 않으면 내 시름도 없으련만]/ 기어세상고노인(寄語世上苦勞人)[보시오 세상 근심 많은 이들이여]/ 신막춘삼월자규루(愼莫登春三月子規樓)[부디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마소]”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457년(세조 3) 9월, 순흥에서 금성대군에 의한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의 여덟 대군 중 유일하게 단종을 도왔던 여섯째 금성대군은 1456년 6월 상왕 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그 후속 조치로 6월 27일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경상도 순흥(順興)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그리고 순흥에서 금성대군은 다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가 실패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단종은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안동으로 압송되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금성 숙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산단 말이냐?”라고 하며 밤을 새워 울었다. 세조의 측근인 정인지(鄭麟趾)[1396~1478], 신숙주(申叔舟)[1417~1475], 한명회(韓明澮)[1415~1487] 등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단종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의정부와 종친부(宗親府), 그리고 충훈부(忠勳府) 및 육조 등과 합세하여 연명으로 “노산군[단종]이 종사(宗社)에 죄를 지었으니 살려 두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국법으로 다스리려야 한다.”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와 관련하여 『세조실록(世祖實錄)』 1457년(세조 3) 10월 21일자 기사에는 단종의 최후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그 내용을 보면, “노산문지 역자액이졸 이예장지(魯山聞之 亦自艦而卒 以禮葬之)”라고 하여 단종의 죽음을 열세 자로 간략히 처리하고 있다. “노산군이 소식을 듣고는 역시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라는 것이다. 실제 단종이 최후를 맞이한 날은 10월 21일이 아닌 10월 24일이었다. 이는 정조(正祖)[1752~1800]의 명으로 1797년 간행된 관찬(官撰) 『장릉사보(莊陵史補)』에서 확인된다. 결국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오후 5~7시 사이에 영월 객사의 동헌인 관풍헌에서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17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3년째 되던 해였고, 상왕위에 있은 지는 2년째 되던 해였다.
그런데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종의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화를 입을까 두려워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종의 시신을 거둔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엄흥도(嚴興道)였다. 엄흥도는 영월군 사람이자 당시 호장(戶長)[아전의 우두머리]이었는데, 1457년 10월 24일 유시[오후 5시~7시]에 단종이 영월 관풍헌에서 세조의 사약을 받고 승하하자, 혼자서 임곡(臨吳)하고 이튿날[을묘] 어머니를 위하여 마련하여 놓았던 옻칠한 관(館)을 가져다 본군 북쪽 5리[약 2㎞] 밖 동을지로 모셔가 서둘러 매장하였다. 가족들이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다투어 만류하자, 엄흥도가 말하기를 “좋은 일을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고 매장을 마친 뒤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고 한다.[『홍제전서(弘齋全書)』]
이후 단종의 무덤은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1541년(중종 36)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1507~1581]이 매장지를 찾아 묘역을 정비하였고, 1580년(선조 13)에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 등을 건립하였다.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으로 추복되면서 능호도 ‘장릉(莊陵)’으로 결정되었다.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에 부묘(祔廟)하고 능호(陵號)를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이 승하한 지 241년 만에 변례(變禮)를 버리고 왕실(王室)의 정례(正禮)를 되찾게 된 것이다. 장릉은 현재 발산(鉢山)에 있는데, 발산은 영월의 진산(鎭山)이다. 영월 시가지에서 북서쪽으로 올려다보면 산의 모양이 삼각형으로 보여 영월에서는 일명 삼각산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장릉의 영조(營造) 양식은 아주 간결하고도 간단하다. 왕릉에 난간을 설치하지 않았고, 석물(石物)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하게 꾸민 능석물(陵石物)로 되어 있으며,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장릉에는 무신석(武臣石)이 없고 문신석(文臣石)만이 있다. 묘 뒤쪽은 반달 모양의 꽃 담장을 둘렀다. 이 꽃 담장은 흙벽돌인 ‘전(壇)’을 진흙을 발라서 쌓고 기와를 얹었다. 그리고 기와 아래 바깥쪽 담은 화강암으로 별을 수놓듯이 장식하여 단아하고 청초한 느낌을 준다. 또한 장릉의 진입 공간에는 재실과 함께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조물이 있다. 예컨대 장릉 입구에는 노산군묘를 찾아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을 기리는 낙촌비각(駱村碑閣), 재실 옆에는 단종의 시신을 처음으로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이 있고, 그 외에도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다. 한편 제향 공간은 홍살문,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춰 한 번 꺾어 조성하였으며, 능침에는 추존왕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도 한 쌍만 조성하였다. 이외 장명등·망주석·문석인·석마 등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으며, 무석인은 생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