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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2675
한자 近代
이칭/별칭 개항기,일제강점기,일제시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상훈

[정의]

개항기인 1864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 경기도 성남의 역사.

[개설]

19세기 중엽 조선의 전통 사회는 안으로는 부패하고 무능한 양반 지배 체제에 반대하는 민중 세력의 힘이 성숙되고, 밖으로는 일본과 서구 열강 침략 세력의 침투,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 강점기를 맞게 된다. 성남 지역은 이 시기에 근대식 학교가 설립되고, 교통의 발전과 이에 따른 시장이 활성화 되었다.

[지방행정구역의 개편]

1895년(고종 32) 5월, 전문 6조의 칙령 98호에 의해 행정구획이 개정되어, 1790년(정조 14)부터 내려온 8도 체제에서 23부제로 개편하고, 다양한 행정 단위를 군(郡)으로 통일하여 23개 부 관할 하에 소속시켰다. 이에 따라 성남 지역이 속한 광주는 한성부(漢城府)의 관할에 속하게 되어 종래 광주부에서 광주군으로 되었다. 하지만 새 지방제도의 생소함과 불합리한 점 등의 이유로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1896년 8월 4일에 23부제를 폐지하고 1부 13도로 개정하였으며, 하부 구조로 1목 7부 331군을 두고 각 군의 등급을 1~5등으로 나누어 조정하였는데, 성남 지역이 속해 있는 광주광주부로서 1등 군으로 되었다. 1906년 9월 24일자 칙령 제49호로 발표된 「지방구역정리의 건」에 의해 광주는 종래 광주부에서 광주군으로 강등되었고, 성남 지역에 속한 세촌면, 돌마면, 낙생면, 대왕면의 동리가 세촌면 7개, 돌마면 15개, 낙생면 14개, 대왕면 21개 동리(洞里)로 증가하였다.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일제 식민 통치에 의한 우리 전통 사회의 해체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던 「도의 위치·관할 구역 및 부·군의 명칭·위치·관할 구역」에 의한 개편 조치로 돌마면 11개 리, 낙생면 11개 리, 대왕면 14개 리, 세촌면중부면으로 명칭이 바뀌고 6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이 시기 종래에 리(里)·동(洞)·촌(村)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던 단위의 명칭이 리(里)로 통일되었다.

[학교 설립과 교육]

성남 지역에 서당 등 구제도에 의한 교육 기관을 제외하고 근대적 개념의 학교가 설립된 것은 1922년 초 낙생면 판교리에 강성오가 설립하고, 황일수가 교장인 신명강습소(新明講習所)가 효시로 학생 수는 50명 정도였다. 이를 토대로 1923년 12월 30일 4년제의 판교공립보통학교[현 낙생초등학교]가 설립 인가 되어, 1927년 3월 21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1932년 대왕면 세곡리에 4년제 대왕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어 이듬해 5월 1일에 개교하게 되었고, 1934년에는 돌마면 이매리돌마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어 10월 9일 개교하였다. 중부면 출장소 관내에는 1936년 4월 강태윤 등에 의해 수진리고개 위에 남한산공립보통학교 부설로서 수진간이학교가 개설되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을 도발, 대륙 침략을 감행하려던 일제가 사회 교육과 민중 계몽 운동이란 미명 하에 경제적 생산성을 증대시키고 이를 수탈하려던 소위 한반도의 병참기지화정책에 교육을 악용함에 따라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개칭하게 되었다. 그 후 판교심상소학교는 1940년 4월부터, 돌마심상소학교와 대왕심상소학교는 1942년 4월부터 각각 6년제로 학년 연장 되었고, 1941년부터는 일제가 전시국민총동원(戰時國民總動員)이란 미명 하에 학교 명칭도 판교국민학교·돌마국민학교·대왕국민학교로 각각 변경되었다.

[성남지역의 3·1운동]

성남 지역이 속해 있던 광주 지역의 3·1운동은 3월 1일 중앙에서 만세 운동이 촉발된 지 25일 만에 일어나 10일 정도 지속하였는데, 3월 26일 송파 지역의 300명 규모의 첫 번째 시위에 이어 27일 성남 지역의 돌마면, 분당리 장날을 이용하여 시작된 시위가 낙생면·대왕면 지역을 순회식으로 1,000여 명이 연합하여 29일까지 3일간 돌마면한백봉·한순회, 낙생면의 남태희, 대왕면이시종·이재순 등이 주도하여 끈질기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공동 전선을 펴서 민족 단일 조직으로서의 신간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는데 신간회 광주지회는 1927년 8월 24일 개성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되었는데 지회장 한순회를 중심으로 석혜환·한백봉·한백호·이대헌·유인목·홍순석·박기환·한용회 등 돌마 지역의 인사들이 중심을 이루어 1930년 초까지 활동하였다.

[교통과 장시]

1939년 광진교의 개통과 더불어 성남 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개통되면서, 북으로는 장리지와 송파를 거쳐 천호동을 경유, 서울까지 연결되고, 동남으로는 오포면 관내를 경유하여 광주읍까지 통하게 되어, 이미 대왕·낙생에서 용인으로 관통하는 탄천 서쪽의 남북대로와 병행하여 성남 지역의 2대 간선도로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서울에서 판교를 경유하여 신갈로 이어지는 노선과 서울에서 송파를 경유하여 분당에 이르는 노선 등 2개의 정기 노선버스가 운행되었다. 이러한 교통의 발전은 성남 지역 장시의 번성으로 이어졌는데, 조선시대 이래 장이 열렸던 낙생장과 1917년 개설된 분당장이 성남 지역의 대표적인 오일장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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