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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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丁奎凞 |
영어공식명칭 | Jeong Gyuhui |
이칭/별칭 | 규암(奎菴),정수길(丁壽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천경석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 정규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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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정규희 선장면 4·4만세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79년 - 정규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정규희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정규희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이티리 |
거주|이주지 | 거주지 - 충청남도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 109-2 |
묘소 | 충청남도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 산292-6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본관 | 나주 |
대표 경력 | 동학 지도자 |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예산 출신으로 선장면 4·4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개설]
정규희(丁奎熙)[1895~1979]는 충청남도 아산 지역 동학 지도자로서 1919년 4월 4일 아산군 선장면 군덕리 장터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가계]
정규희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수길(壽吉), 호는 규암(奎菴)이다.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이티리에서 태어났으며, 1902년경 아산군 선장면 군덕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아버지 정태영(丁泰榮)의 영향을 받아 1907년 13세의 나이에 동학에 입교하였으며, 1908년 신창 사립 신민학교에 입학해서 신학문을 익혔다. 정태영은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아산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한 동학 지도자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에 확산되자 정규희는 김천봉(金千鳳), 서몽조(徐夢祚), 임천근(林千根), 오상근(吳相根) 등과 함께 4월 4일 선장면 군덕리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군중들을 이끌고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정규희는 헌병대에 체포되어 5월 1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죄명은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였다. 불복하고 항소한 뒤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으나 기각되어 다시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형기가 끝나 출옥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천도교 활동을 이어갔다.
1926년 순종황제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온양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1938년에는 아산 지역 천도교 무인멸왜기도운동(戊寅滅倭祈禱運動)에도 참여하였다가 다시 체포된 후 온양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신병을 얻어 13일 만에 풀려났다. 1975년 3월 10일 천도교 대표 49인의 한 사람으로 을묘통일선언에 참여하였다.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 산292-6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3·1운동을 주도하고 옥고를 치른 공훈을 인정받아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각각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