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980
한자 孝子姜鳳壽旌閭
영어공식명칭 Monument for Filial Son Gang Bong-su[Hyoja Gang Bong-su Jeongnyeo]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신흥리 7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여송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74년연표보기 - 효자 강봉수 명정이 내려짐
현 소재지 효자 강봉수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신흥리 76 지도보기
원소재지 효자 강봉수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신흥리
성격 정려
양식 겹처마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관리자 진주강씨 문중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신흥리에 있는 효자 강봉수의 조선 후기 정려.

[개설]

강봉수(姜鳳壽)[1543~1615]의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충청도 온양에서 태어났다. 자는 덕수(德叟), 호는 옛 문헌에 송암(松庵)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세인들은 강봉수를 ‘창암선생(窓巖先生)’이라고 불렀고 후손들도 창암공파로 칭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진주강씨 온양 입향조 판관 강자위(姜自謂), 할아버지는 강문필(姜文弼), 아버지는 강기(姜琦)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었고, 15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진산군수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다가 1604년 건강이 좋지 않아 평창군수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진산군수 재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금산전투에서 고경명(高敬命)과 조헌(趙憲)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진산에서 장정들을 모아 왜적과 맞서 싸워 진산을 지켰다. 이때의 공으로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올랐고, 후에 다시 원종삼등공신(原從三等功臣)에 책록되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강봉수는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운 성품이 있었으며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 자신의 불효를 책망하며 3년 동안 부친의 묘를 찾아 성묘하였고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이러한 충효 정신에 대해 1666년(현종 7) 송준길(宋浚吉)의 간언이 있어 1674년(현종 15)에 효자 명정을 받았다. 그 후 1791년(정조 15) 예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온양 정퇴서원의 충효당에 배향되었다.

[위치]

효자 강봉수 정려아산시 배방읍 신흥리에 있다. 배방산성이 있는 성재산 서쪽의 신흥리 감탁[감택이]마을 입구의 왼쪽 구릉 위이다. 본래의 위치는 현재 위치의 아래였으나 공장을 짓는 관계로 조금 위쪽인 현재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동쪽 100m 지점에 강봉수의 묘가 있다.

[형태]

효자 강봉수 정려각은 정면과 측면 각 1칸 규모의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콘크리트 기단 위에 긴 팔각 장주 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다. 벽은 붉은 벽돌을 쌓은 뒷면을 제외한 삼면을 철제 홍살로 둘렀고, 그 삼면의 하방 아래는 역시 붉은 벽돌로 벽을 설치하였다. 좌우 측면에는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명정 현판에는 ‘효자 통정대부상의원정 증가선대부예조참판 겸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강봉수지려 숭정병오육월일명정(孝子通政大夫尙衣院正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姜鳳壽之閭 崇禎丙午六月日命旌)’이라고 쓰여 있다.

[의의와 평가]

효자 강봉수 정려는 충효로 이름을 남긴 강봉수의 효행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정퇴서원 충효당은 훼철된 지 오래되었으나 인근에 있는 강봉수의 묘와 함께 아산 지역 명문가인 진주강씨 집안의 주요 역사 인물 중 한 사람인 강봉수의 행적을 되새길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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