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369 |
---|---|
한자 | 泗陽書堂 |
영어의미역 | Sayang Village School |
이칭/별칭 | 사양 서원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서원길 15-10[신리 43-1]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호열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에 있는 조선 중기 서원.
[개설]
사양 서당은 본래 조선 시대 서원으로 1864년 대원군 서원 철폐 때 대부분의 건물이 헐리고 지금은 강당인 경회당과 솟을대문만 남아 있다. 조선 시대 서원은 선현(先賢)과 향현(鄕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를 아울러 갖추고 있었다. 사(祠)와 재(齋)의 기능을 겸비한 최초의 서원은 1542년(중종 37)에 경상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의 옛 집터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경적(經籍)을 구입하여 유생들을 가르친 백운동 서원이다. 백운동 서원이 사액을 받아 소수 서원으로 변경되었고 소수서원이 설치된 이후 서원의 수는 급격히 늘어나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 설치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렀다. 국가 공인의 절차인 사액을 내린 서원도 늘어나 숙종 때만 해도 130여 개소에 이르렀다.
초기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향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사림(士林)의 공론을 형성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점차 혈연·지연 관계나 학벌·사제(師弟)·당파(黨派)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 집단화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유생은 관학인 향교를 외면, 서원에 들어가 붕당에 가담하여 당쟁에 빠져 향교의 쇠퇴를 가속시켰다. 서원의 폐단에 대한 논란은 인조 이후 꾸준히 있었으나 대원군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고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설립 목적]
사양서당은 1651년(효종 2) 유학자 한강 정구[1543~1620]가 일생 동안 학업을 닦던 사수동에 창건된 후 1694년(숙종 20)에 지천면 신리 섬마 마을로 옮겨 한강 선생을 주벽으로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를 배향하고 송암(松巖) 이원경(李遠慶)을 별사에 모셨다.
[변천]
창건 당시에는 강당 외에 묘우(廟宇)와 강당, 폄우제(貶遇齊), 정완재(訂頑齋), 봉하문(鳳下門), 양현청(養賢廳). 주고(廚庫) 등이 있었으나 1868년(고종 5)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리고 지금은 강당인 경회당과 솟을대문, 변소만 남아있다. 강당인 경회당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황]
사양 서당은 방형의 평탄한 대지에 강당과 솟을대문을 ‘二’자형으로 배치하고 주위에 토담을 쌓았다. 강당인 경회당(景晦堂)은 조선 후기에 지은 이익공계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1칸반의 규모이다. 평면은 가운데 3칸의 넓은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온돌방을 둔 형태이다. 대청과 온돌방 앞에는 개방된 반칸 폭의 툇마루를 꾸몄다. 지붕은 박공지붕에 한식 기와를 덮었다. 솟을대문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로 가운데 있는 대문간의 지붕을 솟을지붕으로 지었다.
[의의와 평가]
사양서당은 한강 정구를 주벽으로 모신 서원으로 창건되었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린 후 사양 서당으로 격을 낮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시대 서원의 설립 및 변화 과정을 잘 보여주며, 강당의 독특한 평면과 당당한 구조 형식은 서원 건축의 변천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