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8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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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상북도 칠곡군의 역사.
[개설]
칠곡군은 지리적으로 영남 대로(嶺南大路)와 낙동강 수운의 교통 요충지인 동시에 군사적 요충지이다. 지금은 경부 고속 도로, 중앙 고속 도로, 고속 도로, 일반 국도, 지방도, 시군도 등이 서로 연결되어 낙동강을 건너 전국으로 통하며, 경부선 철도가 남북으로 관통하는 사통팔달의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칠곡군은 이러한 입지적 조건을 활용하여 영남 지역 물류 거점 단지를 넘어 전국 제일의 물류 중심 도시로의 도약을 꾀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 전쟁 등 전쟁 때마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것은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볼 수 있다. 칠곡은 일본의 무역 거점인 왜관이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왜관’이란 지명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칠곡은 종교사적으로 천주교가 일찍이 전파되어 조선 말에는 한티 교우촌에서 많은 순교자가 나기도 했으며, 특히 신나무골 성지는 영남 지역 최초의 천주교 전파지로 대구교구의 산파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신라 시대 대목현(大木縣)[지금의 북삼읍·약목면·기산면 지역]과 사동화현(斯同火縣)[지금의 석적읍·가산면 지역], 그리고 팔거리현(八居里縣)[지금의 왜관읍·지천면·동명면 지역]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변천하여 오늘의 칠곡군이 되었다.
[선사]
칠곡군은 경상도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석적읍 성곡리에서 구석기 중기 시대에 해당하는 르발루아 첨기(Levallois尖器)·식칼[chopper]·돌망치 등 유물이 출토되어 구석기 중기에 인류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북삼읍 오평리 말구리 일대에 대한 지표 조사를 통해 후기 구석기 시대로 보이는 돌날박편 1점과 박편 1점이 수습되었으며, 오평리 사말리에서는 박편 석기 몇 점이 수습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다수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북삼읍 율리, 왜관읍 석전리, 지천면 신리, 동명면 금암리, 석적읍 남율리, 약목면 복성리 등에는 고인돌과 돌널무덤 등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북삼읍 율리 안배미 마을에서는 간석기나 민무늬 토기 조각들도 일부 확인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 유물과 유적은 여러 지역에서 수습됨으로 보아 이 시대에 인류가 다수 살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고대]
칠곡군은 진한과 신라의 영토에 속하였으나, 변한과 가야의 영향도 많이 받았던 지역이다. 삼한 시대 진한의 군미국(軍彌國)과 변한의 변군미국(弁軍彌國)이 이곳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소국의 존재 형태나 행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칠곡 지역에 자리 잡았을 것으로 보이는 진한소국, 변한소국[혹은 가야소국]들은 신라의 군사력에 밀려 결국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가야의 고분은 주로 낙동강 서쪽 지방과 하류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낙동강 동쪽 지방과 상류 지역에는 그 수효가 적은 편이다. 낙동강 중류 지역에 해당하는 칠곡 지역에도 정밀한 발굴 조사를 해 보면 가야 고분이 상당수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신라 시대 757년(경덕왕 16) 대목현 또는 칠촌(七村)은 계자현(谿子縣)으로, 사동화현은 수동현(壽同縣) 또는 옥산(玉山)으로 각각 변경되어 성산군(星山郡)[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에 소속되었다. 팔거리현은 북치장리(北恥長里) 또는 인리(仁里)라고 불렀으며 팔리현(八里縣)으로 변경되어 수창군(壽昌郡)[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에 소속되었다.
후삼국 시대에는 견훤과 왕건의 세력이 경쟁적으로 이 지역에 진출하였다.
[고려 시대]
940년(태조 23) 계자현은 약목현(若木縣)으로 변경되어 경산부(京山府)[지금의 성주군]에 소속되었으며, 수동현은 인동현(仁同縣)으로, 팔리현은 팔거현(八莒縣)으로 변경되었다. 1018년(현종 9) 인동현과 팔거현이 경산부에 소속되었고, 1391년 약목현은 인동현 소속이 되었다.
고려 시대의 경우 속읍 지역에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고, 수령이 파견된 주읍 지역의 간접적 지배를 받았다. 그것은 주읍에 비해 전결 수와 호구 수가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이다. 1031년에 만들어진 약목현의 정도사지 오층석탑의 조성기는 고려 초 지방 사회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 시대]
조선 초에 약목현은 여전히 인동현의 속현으로, 팔거현은 성주목(星州牧)[경산부가 승격]의 속현으로 있었다. 『경상도 지리지』에 의하면 호구 수는 657호, 4,551인이 있었다. 당시 이곳의 토지는 절반만 비옥했고, 풍속은 양잠에 힘썼다고 한다. 1593년(선조 26) 경에 경상도 감영이 일시 팔거현으로 옮겨지면서 이 지역이 중요시되었다.
1601년(선조 34) 인동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조방장(助防將)을 두어 부사가 겸임하게 되었다. 1640년(인조 18) 팔거현은 칠곡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좁은 지역에 인동도호부와 칠곡도호부, 두 개의 도호부가 설치된 것은 칠곡 지역이 경상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영인 대구를 방비할 수 있는 천연적인 요새였기 때문이다. 『칠곡읍지』에 실려있는 김종옥(金宗玉)의 「동문기(東門記)」를 보면 “팔공산의 서쪽, 금호강의 북쪽에 고을의 터를 잡아 우뚝 높은 곳에서 언덕과 산꼭대기를 임하고 있는 것이 칠곡도호부가 된다. 돌산으로 둘러 쌓였는데 그 형상이 키[箕]와 같은 까닭으로 기성(箕城)이라 이름한다. 성 사방 귀퉁이에 모두 관문을 설치하여 지키는데 동쪽 성 한 문(門)이 가장 관문의 요충지가 된다 한다.”라고 한 것에서 보다시피 천험의 요새이다.
[근현대]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 때 23부제가 실시되면서 인동 도호부는 인동군으로, 칠곡 도호부는 칠곡군으로 변경하여 대구부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도호부 및 별장을 폐지하고 군수를 두었다. 1896년 23부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다시 13도 7부제로 개편하면서 인동군과 칠곡군은 대구부에서 분리하여 경상북도 소속으로 변경하였다. 1911년 인동군청을 인동면에서 약목면 복성동으로 옮겼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인동군이 칠곡군에 병함됨으로써 오늘의 골격을 갖추었다, 이때 왜관면·지천면·칠곡면·동명면·가산면·인동면·석적면·북삼면·약목면 등 9개 면 99동으로 개편되었다. 칠곡군청은 칠곡면에서, 인동군청은 약목면에서 왜관면으로 옮겼다.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일 운동에 칠곡의 많은 인사들도 가담하여 1919년 3·1 운동으로 이어졌고, 인동면·약목면·석적면 등지에서 만세 운동이 계속 전개되었다.
1949년에 왜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1980년에는 칠곡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8년 인동면 일원이 구미시로, 1981년 칠곡읍 일원이 대구광역시로 각각 편입되었다. 1974년 약목면 동부 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6년 기산면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에는 선산군 장천면 석우리가 가산면에 편입되었고, 1989년에는 가산면 신장리가 선산군에 편입되었다. 2003년에 북삼면이 북삼읍으로, 2006년에 석적면이 석적읍으로 승격되었다. 2014년은 왜관 칠곡군청 개청 100주년이 되는 해로, 현재 3개 읍, 5개 면, 73개 법정리, 203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한편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대구를 함락하기 위한 북한군의 주력이 이곳을 공격해 와 낙동강을 경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때 아군은 고투 끝에 가산면 다부동전투에서 승리하여 전세를 반전시켰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이 설치되었던 대격전지였기 때문에 대부분 전쟁 직후에 취락을 비롯한 지역 경관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교통이 편리한 인근 대도시의 통근권에 들어 있어 생활 기반을 주로 대구광역시·구미시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 들어 대구와 구미의 섬유 및 전자 공업을 지원하는 소규모 하청 공장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1989년에 조성된 왜관 산업 단지에는 총 200개의 업체가 입주해 있는데 업종별로는 섬유·비금속·화학·식료품·기계 공업 등이다. 칠곡 지역은 대구-왜관-구미를 연결하는 대공업 지대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유물·유적]
선사 시대의 유적으로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의 신동 입석(新洞立石)[경상북도 기념물 제29호], 왜관읍 석전리, 지천면 심천리, 석적읍 중리, 동명면 금암리·기성리 등에 고인돌이 있다. 삼국 시대의 고분으로 봉산리 고분군, 복성리 고분군, 무림리 고분군, 심천리 고분군, 금암리 고분군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복성리 고분군은 1960년에 발굴, 조사되어 토기·철기 등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산성으로는 사적 제216호인 가산면 가산리의 칠곡 가산산성(架山山城)과 약목면 무림리의 박집산 봉수대(朴執山 烽燧臺) 터가 있다.
불교 문화재로는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의 송림사(松林寺)가 있다. 절터로는 고려 현종 22년(1031) 기명(記銘)의 오층 석탑 조성 형지기(造成形止記)가 발견된 것으로 유명한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의 정도사지(淨兜寺址)가 있다. 이 밖에 칠곡 송림사 오층 전탑[보물 제189호], 칠곡 기성리 삼층 석탑[보물 제510호], 송산리 석불, 칠곡 선봉사 대각 국사비(漆谷 僊鳳寺 大覺 國師碑)[보물 제251호], 칠곡 노석리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보물 제655호], 영오리 석불 입상, 칠곡 송림사 대웅전[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434호] 등이 있다.
유교 문화재로는 칠곡군 지천면 신리의 사양 서당 강당(泗陽 書堂 講堂)[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17호], 창평리의 칠곡 녹봉 정사지(鹿峰 精舍址), 기산면 평복리의 소암 서당(嘯巖 書堂), 석적읍 중리의 봉양 서원(鳳陽 書院), 화산 서당(花山 書堂)[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20호], 북삼읍 숭오리의 어필각(御筆閣), 약목면 남계리의 숭무사(崇武祠), 신유 장군 유적(申瀏將軍遺蹟)[경상북도 기념물 제38호] 등이 있다. 어필각에는 장복추(張福樞)가 지은 「어필각 상량문(御筆閣 上樑文)」, 허훈(許薰)이 지은 「어필각기(御筆閣記)」가 보관되어 있다.
고가옥으로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의 묵헌 종택(默軒 宗宅)[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45호], 매원리의 칠곡 해은 고택(海隱 故宅)[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178호] 등이 있다. 기타 유물·유적으로는 북삼읍 율리의 조정 종손가 소장 전적(趙靖宗孫家所藏典籍)[보물 제1004호],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의 칠곡 가실 성당[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48호]이 있다. 도립 공원의 일부인 칠곡 가산산성과 경상북도 팔경 가운데 첫째인 금오동천(金烏洞天)이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에 있고 왜관읍 낙산리에 칠곡 금무봉 나무고사리 화석 산지(漆谷 錦舞峰 나무고사리 化石 産地)[천연기념물 제146호]가 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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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6 | [개설] 수정 | <변경 전> 한티교우촌, 신나무골 등지에서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특히 신 나무골은 영남지역 천주교 전파지로 <변경 후> 한티교우촌에서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특히 신나무골은 영남지역 천주교 전파지로 |
2013.08.06 | [고려시대] [유물 유적]수정 | <변경 전> 약목현(葯木縣) / 성주노석마애불상군 <변경 후> 약목현(若木縣) / 칠곡 노석리 마애불상군 |
2011.05.24 | 내용 수정 | 정토사 5층석탑 -> 정도사지 오층석탑 |
2011.05.23 | 내용 수정 | 이동혜현 -> 이동화혜로 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