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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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의미역 | Goryeo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경상북도 칠곡 지역의 고려시대 역사.
[개설]
고려시대 초에 수동현(壽同縣)이 인동현(仁同縣)으로, 계자현(谿子縣)이 약목현(若木縣)으로, 팔리현(八里縣)이 팔거현[八居縣이 후에 八莒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인동현은 940년(고려 태조 23)에 주군현(州郡縣) 개편 때 수동현(壽同縣)이 인동현(仁同縣)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생겨났다. 1018년(현종 9) 경산부(京山府)[현재 경상북도 성주군]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년)에 경산부에서 분리·독립되었다. 그와 더불어 인동에 감무(監務)를 설치하고 약목현(若木縣)을 영속(領屬)시켰다. 약목현은 940년(고려 태조 23) 계자현(谿子縣)에서 약목현(若木縣)으로 명칭이 변경하면서 생겨났다. 1018년(현종 9)에 경산부(京山府)[현재 성주]의 임내로 하였다가,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인동현(仁同縣)에 감무(監務)를 둘 때 그 속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太祖) 때 757년(신라 경덕왕 16) 행정구역 개편 때 생겨난 팔리현(八里縣)을 다시 팔거현(八居縣)으로 고쳤다가 뒤에 발음이 같은 거(莒)로 고쳐 팔거현(八莒縣)이라 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팔거현을 수창군(壽昌郡)[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에서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현재 성주]에 소속시켰다. 칠곡(七谷)이라고도 불렸다.
[불교 유적]
불교 유적으로는 정도사지 5층석탑 조성형지기(淨兜寺址 五層石塔 造成形止記), 선봉사 대각국사비(僊鳳寺 大覺國師碑), 송산리 석불(松山里 石佛), 영오리 석불입상(永梧里 石佛立像), 가산리 사지(架山里 寺址), 대흥사지(大興寺址), 망정리 사지(望亭里 寺址), 백운리 사지(白雲里 寺址), 숭오리 사지(崇烏里 寺址), 영리 사지(永里 寺址), 황학리 폐탑(黃鶴里 廢塔) 등이 있다.
정도사지 오층석탑과 조성형지기는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정도사지에 위치하고 있다. 5층석탑은 고려 전기 탑의 조성이 민간에게 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갔고, 그 과정에서도 각 지역별 특색에 맞게 석탑이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형지기는 고려 전기 지방 사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형지기에는 건탑의 인연(因緣), 시납(施納)의 상황, 공사의 사실, 양전(量田) 등을 이두식 표현으로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이두 연구뿐 아니라 고려 전기의 사회사·경제사·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선봉사 대각국사비는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비이다. 해서체로 행마다 71자로 37행으로 작성되어 있으며, 제액(題額)은 ‘천태시조대각국사비명(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이다. 비문은 임존(林存)이 짓고, 승(僧) 인(麟)이 쓰고 전액하였다. 비문의 내용에는 국사가 문종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예대후(仁睿大后), 휘는 석후(釋煦), 자는 의천(義天)이라는 것과 송나라 유학에서의 구법 활동, 그리고 천태교(天台敎)를 확립하는 과정 및 교화, 그 밖에 국사가 남긴 유교명(遺敎銘) 등이 실려 있다.
[대표적 인물]
칠곡군의 고려시대 대표적 인물로는 류익정(柳益貞), 유원순(兪元淳), 배균(裵均), 배천경(裵天慶), 왕후(王煦), 김양검(金良劒), 이집(李集), 장안세(張安世), 장중양(張仲陽), 한방도(韓方道), 김수(金洙) 등이 있다.
김수(金洙)는 고려 후기·조선 전기의 문관으로 호는 송정, 본관은 해평으로 장렬공 훤술의 후손이다. 고려시대 충목왕 때 문과에 장원하여 1363년(공민왕 12)에 사예를 지내고 그 후 대사간 직제학을 거쳐 개성부윤에 이르렀으며,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 때 공을 세워 해평군에 봉해지고, 1392년(태조 원년) 조선이 개국된 뒤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그 후 일선에서 제자를 가르쳤고, 성산으로 거처를 옮겨,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도은 이숭인과 더불어 도의(道義)를 논하고 녹봉서당을 세워 후진 양성에 진력하는 한편 천곡에 정사를 지어 정자 및 주자를 제향했다. 현감 도현보가 공의 행장을 지었고, 칠곡군 지천면 창평동의 법곡산에 묘소가 있다.
유원순(兪元淳)의 본명은 유승단(兪升旦)으로, 고려 명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관료이다. 고려 고종(高宗)의 사부로, 인동유씨의 시조이다. 희종 때 남경(南京)의 사록참군(司錄參軍), 1223년(고종 10)에 예부시랑 우간의대부(禮部侍郎右諫議大夫), 1227년(고종 14)에는 수찬관(修撰官)으로서 최보순(崔甫淳)·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 등과 함께 『명종실록』을 편찬하였다. 또한 1228년(고종 15)에 추밀원부사 좌우산기상시(樞密院副使左右散騎常侍)에 올랐고, 뒤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배천경(裵天慶)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경주배씨 현경계(玄慶系)에서 분적한 대구배씨의 시조이다. 1354년(공민왕 3)에 체제 정비를 위한 대대적인 인사 개편이 단행될 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356년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에 올랐는데, 이 때 동북면이 수복되어 경영이 중요하게 되었으므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특차되었다. 2년 뒤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에 오르고 뒤에 동경윤(東京尹)을 지냈다.
왕후(王煦)는 고려 후기의 문관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원래 이름은 권재(權載)이다. 몽고명은 탈환(脫歡)이다. 충선왕의 신임을 받은 형(兄) 준(準)의 덕분으로 낭장에 오르고, 다시 삼사판관(三司判官)으로 전임되었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불려가 아들로 입적되면서 왕후라는 이름이 하사되었다. 1308년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과 함께 돌아와 사복부정(司僕副正)을 거쳐 사헌집의(司憲執義)에 제수되었다. 1314년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1316년(충숙왕 3)에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봉해지자 사람들이 왕의 아우라 칭하였다. 1349년(충정왕 1) 원나라에 가서 성절을 축하하고 돌아오던 중에 창의현(昌義縣)에 이르러 병사하였다.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김양검(金良劍)은 고려 후기의 무관이다. 1363년(공민왕 12) 대호군(大護軍)으로 있으면서, 1361년(공민왕 10)의 홍건적(紅巾賊)으로부터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일등 공신이 되었다. 1371년(공민왕 20)에 신돈(辛旽)이 주살될 때 그와 연루되었던 관계로, 나송(羅松)·김휘서(金暉西) 등과 함께 장류(杖流)되었다.
유익정(柳益貞)은 고려 후기 문관으로, 자는 미상이며 본관은 문화이다. 고려 후기에 삼중대광을 역임하고, 곤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칠곡군 석적읍 망정리에 공의 신도비가 있는데, 안동인 권상규가 비문을 짓고, 이만기가 글씨를 썼다.
이집(李集)은 고려 후기의 학자·문인으로,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1368년(공민왕 17)에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전야(田野)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三隱)의 기(記)·서(序)·서(書)는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하여준다. 저서에 『둔촌유고(遁村遺稿)』가 있다.
장안세(張安世)는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에 16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말 정헌대부(正憲大夫) 덕녕부윤(德寧府尹)의 관직에 있을 때 함주(咸州)[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갈한천(乫罕川)이 해마다 범람하여 재해가 많았으나 해당 수령들이 그 대책을 세워 해결하지 못하자 특별히 함주부사로 임명되었다. 10여 년 동안 함주에 재임하여 있으면서 치수공사를 완수하였으며, 또 목판으로 길이 70간이나 되는 만세교(萬世橋)라는 다리를 놓았다. 그 뒤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다. 태조가 친필의 편지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아들 중양(仲陽)과 함께 경상북도 구미의 인동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저서는 『송은실기』가 있다.
[분묘]
분묘에는 낙산리 분묘(洛山里 墳墓), 달서리 분묘군(達西里 墳墓群), 심천리 분묘(深川里 墳墓), 율리 분묘군(栗里 墳墓群), 창평리 분묘군(昌坪里 墳墓群), 황학리 분묘군(黃鶴里 墳墓群) 등이 있다.
[산성]
산성(山城)으로는 금오산성(金烏山城)이 있다. 금오산성(金烏山城)은 경상북도 구미시와 김천시 남면과 칠곡군 북삼읍에 걸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와 계곡을 감싸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둘레가 약 3.5㎞이다. 현재 남·서·중문 및 암문(暗門: 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게 만든 성문)과 건물지,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 등이 남아 있다. 내성은 정상부에 테를 두른 모양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0리나 되며, 험한 절벽에는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외성은 계곡을 감쌌는데 둘레가 5리나 되며, 내·외 성벽의 길이는 6.3㎞나 된다. 금오산성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 성터로, 고려 말에 선산(善山)·인동(仁同)·개령(開寧)·성주(星州) 백성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에 들어와 성을 지켰으며,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두었던 군창을 두었다. 1410년(태종 10)에 국가적 계획으로 크게 고쳐 쌓았으나, 이민족의 침입이 없자 차츰 폐허가 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인식되어 1596년(선조 28년)에 다시 고쳐 쌓았다. 1639년(인조 17년)에 외성을 쌓는 확장 공사가 실시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고, 1868년(고종 5년)에 새로 고쳐 쌓았다. 한편 부근에는 도선굴(道詵窟)·금오서원(金烏書院)·길재사(吉再祠) 등이 있었다.
[도요지]
칠곡군의 도요지로는 달서리 요지(達西里 窯址), 창평리 요지(昌坪里 窯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