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8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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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玏 |
영어음역 | Jo Reu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봉희 |
성격 | 자선사업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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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 |
성별 | 남 |
생년 | 1649년 |
몰년 | 1714년 |
본관 | 한양(漢陽)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자선 사업가.
[개설]
조륵(趙玏)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에서 출생하였다. 조륵이 재산을 모은 일과 관련하여 음성 지역과 충주 지역에는 많은 일화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자린고비라 하여 구두쇠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지만 실은 자선 사업가를 의미하는 대명사로 씀이 바람직할 것이다.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 선조 때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지낸 조경(趙經)의 4세손이며, 음성에서 중부참봉(中部參奉)을 지낸 조유증(趙惟曾)의 넷째 아들이다. 조륵은 슬하에 5남매를 두었다.
[활동사항]
조륵은 평생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숙종 때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굶주리자 모은 재산을 나누어 진휼하니, 호남과 영남 양도의 굶주린 백성 만여 명이 구제되었다. 이에 지방민이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고 관청과 향리 등에서 서로 표창하여 칭송하니, 임금이 이를 듣고 상을 내리고 여러 차례 명하여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조륵이 재산을 모은 것에 대한 많은 일화가 음성과 충주 지역에 전해오고 있다. 무더운 여름철이 되어 부채를 하나 사오면 그 부채가 닳을까 염려되어 부채를 벽에 매달아 놓고 그 앞에 가서 머리만 흔들거리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신발이 닳는다고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는 신발을 벗어 들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한 북어장수가 대문 안에 북어 한 마리를 던져 주었더니 그것을 본 자린고비가 어느 놈이 밥 많이 먹게 하느라고 밥벌레를 갖다 놨다며 거름더미에 파묻었다는 이야기, 어물이 먹고 싶으면 시장의 어물가게를 찾아가 이것저것 만지며 값을 묻다가 그대로 와서 손 씻은 물을 장에 넣어 먹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지고 있다.
조륵이 죽어 장례를 치를 때 입관을 위하여 상여를 운구하는 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상여의 앙장(仰帳: 상여 위에 포장같이 덮은 천)이 날아갔다고 한다. 이를 따라 가보니 묘 터가 좋아 처음 잡았던 터는 두고 앙장이 떨어진 곳에 묘를 조성하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고 한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화치에 있다.
[상훈과 추모]
조륵이 죽은 후 조륵의 도움을 받은 많은 사람이 비를 세웠으니 비의 이름이 ‘자인고비(慈仁考碑)’였다. 자인고비는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에 소재한 신덕저수지 근처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저수지에 잠겨 고증할 길이 없다. 1995년 10월 후손들에 의해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화치마을 뒷산 중턱에 자인고비가 다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