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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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百萱 |
영어음역 | Min BaEkhwon |
이칭/별칭 | 여원군(驢源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유봉희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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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
성별 | 남 |
몰년 | 1383년 |
본관 | 여흥 |
대표관직 | 지문하상의 |
[정의]
고려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여흥(驢興). 아버지는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지낸 민함계(閔咸啓)이고, 아들은 조선 초기 문신인 민수산(閔壽山), 손자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신에 오른 민발(閔發)이다.
[활동사항]
민백훤은 어렸을 때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전평리 새눈이에서 살았으며 1374년(우왕 즉위) 11월에 전공판서(典工判書)로 사신이 되어 밀직사 장자온(張子溫)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공민왕(恭愍王)의 부음을 알리고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과 왕위 계승을 청하였다. 이 때 명나라 사신 임밀(林密)과 채빈(蔡斌)이 고려에 와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호송관이었던 김의(金義)[胡人]가 채빈과 채빈의 아들을 죽이고 임밀을 붙잡아 북원(北元)으로 달아난 일이 있었다. 이에 민백훤과 장자온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도망해 돌아왔다.
1380년(우왕 6)에 왜구가 광주(光州)·능성(綾城)·화순(和順) 등에 침입하자 원사(元師) 최공철(崔公哲), 김용휘(金用輝)·이원계(李元桂)·김사혁(金斯革) 등과 함께 전라도에 내려가 왜구를 방어하여 이 해 10월에 서경도부원수(西京都副元帥)가 되고 이어서 지문하상의(知門下商議)가 되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만승면 실안리(實安里)에 있다.
[상훈과 추모]
민백훤이 죽은 후 84년이 지난 뒤 민백훤의 손자 민발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3등이 되었고 증삼한삼중대광보국(贈三韓三重大匡輔國) 벽상공신문하시중(壁上功臣門下侍中) 여원군(驢源君)에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