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922 |
---|---|
한자 | 閔發 |
영어음역 | Min Bal |
이칭/별칭 | 분충(奮忠),위양공(威襄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유봉희 |
성격 | 무신 |
---|---|
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
성별 | 남 |
생년 | 1419년 |
몰년 | 1482년 |
본관 | 여흥 |
대표관직 | 병조판서|숭록대부|판중추부사 |
[정의]
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분충(奮忠). 증좌찬성(贈左贊成) 민수산(閔壽山)의 아들이고, 증문하시중(贈門下侍中) 여원군(驪源君) 민백훤(閔佰萱)의 손자이다. 친형은 민서(閔叙)이다.
[활동사항]
민발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크고 힘이 세어 13세 때 무술 연마를 위해 마을 앞 큰 바위를 움직여 등에 지고 사장(射場) 터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음보(蔭補)로 내금위의 벼슬을 거쳐 부사직(副司直)이 되었고, 1453년 무과에 급제한 후 수양대군이 명나라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갈 때 동행하였다.
이 때 만주 요령(遼寧)에서 도적떼가 습격하여 공물(貢物)을 약탈해갔는데, 민발은 사세를 관망하고 물건 훔친 자를 큰 철봉 하나로 날랜 동작으로 물리쳐 도적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감으로써 큰 공을 세웠다.
1466년에 무과중시·등준시(登俊試)에 급제한 후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고, 이듬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공신(功臣)에 오르고 여산군(驪山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1468년 초에 형 민서가 남이(南怡)와 함께 모반했다는 혐의로 형은 처형되고, 민발은 연좌에 의해 유배되었으나 왕의 특명으로 복직되기도 하였다.
성종이 장차 덕종을 태묘에 부제하려 하여 정원·육조·대간·홍문관을 모아 의논하는 자리에서 민발은 공신으로 참여하였는데,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제사 지내는 것이 맞거늘 어찌 다른 논의가 있겠느냐’ 면서 종묘에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보면 민발은 무인이었지만 착하고 도덕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또한 화살 쏘기 등 무예적인 면에서는 자신도 능통함을 인정하였지만, 글자 쓰는 재주는 백 번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스스로 이야기한 것을 보아 솔직하고 꾸밈없는 성품을 알 수 있다.
[묘소]
묘는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柳村里) 능안에 있으며 묘역은 약 150여 평으로, 묘 앞에는 상석·망부석, 대리석 묘표와 봉계(鳳溪) 윤유(尹揄)가 찬한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위양(威襄)이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 3등에 올랐다. 남이의 모반에 형이 연루되어 연좌로 유배당하기도 하였지만, 특명으로 병조판서 숭록대부 판중추부사로 복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