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1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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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川場 |
영어의미역 | Hancheon Markets |
이칭/별칭 | 한내장터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중동리 한내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예경희 |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중동리에서 개시되다가 1982년에 폐시된 재래 시장.
[개설]
한천장(漢川場)은 일명 한내장터라고도 하며 1919년 3·1운동 당시 음성 지역에서 가장 치열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천장은 서쪽으로 20여 리 지점에 음성군 음성읍 음성장, 동남쪽 20여 리 지점에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목도장(牧渡場)이 있어 음성장과 목도장의 중간 지점에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이동거리 관계로 장시가 열린 것으로 보고 있다.
한천장은 1일과 6일에 장시가 열렸으며, 다음날인 2일과 7일에는 음성장과 목도장에서 장이 열렸다. 따라서 이동 상인인 행상들이 향촌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매집을 위하여 한천장을 주로 이용하였다. 한천장의 1938년 당시 거래액은 64,590원이었고, 1980년에는 시장 면적 4,290㎡에 점포는 26개였다.
[명칭유래]
1830년대에 편찬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한천장의 기록이 처음 나오고 있다. 한천(漢川)의 명칭은 큰 내가 있는 마을이라는 한내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한내에서 열리는 장이라 하여 한천장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우목장(牛目場)은 현재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금고리 우목에 있던 장으로 예전에는 수로를 통하여 남한강의 배들이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목도나루에서 한내를 거쳐 우목까지 다녔다고 한다. 1770년(영조 46)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는 한천장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우목장이 기록되어 있어 우목에서 장시가 열렸던 것으로 보고 있다.
1830년대에 편찬된 『임원경제지』에 우목장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한천장으로 기록되어 있어 1830년대에 우목장이 한천장으로 옮겨 장시가 열리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872년에 제작된 「충주목지도」에서는 한천장이 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에는 한천장을 우목장으로 옮겨 우목장이 열린 것으로 추정된다.
1909년에 발간된 『한국충청북도일반』장시권도에 한천장이 표기되어 있으며,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1:50,000 지형도에도 한천장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1900년대 다시 우목에서 한내로 옮겨 장시가 열렸으며 그 이후로는 큰 변동없이 한천장이 열린 것 같다. 한천장은 1960년대 들어와서 교통의 발달로 음성장으로 흡수되어 쇠퇴의 길을 걷다가 1982년에 폐시되었다.
[위치비정/행정구역상의 구분]
한천장의 소재인인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중동리 한내는 조선시대 충주목 소파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목도나루에서 음성 지역으로 오는 데는 한내를 경유해서 와야 했다. 한천장은 음성장 보다는 목도장권에 해당하는 데 그것은 목도나루가 고대로부터 남한강 상류에 있어 소금 교역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도나루에서 한천장까지 배가 운행되어 한천장은 수운과 연결된 장시이었다.
[관련기록]
1830년대에 편찬된 『임원경제지』에 한천장의 기록이 있으며, 1872년에 제작된 「충주목지도」, 1909년에 발간된 『한국충청북도일반』장시권도,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작성한 1:50,000 지형도 등에 한천장과 관련된 기록이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