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2220 |
---|---|
한자 | 陽村權近- |
영어의미역 | The Tale of Gwon Geu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상임 |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전해오는 권근과 조선 태조에 관한 설화.
[개설]
권근(權近)[1352~1409]은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서 크게 활약한 대학자이며 문학가이다. 1352년(공민왕 원년)에 검교정승 권희(權僖)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권진(權晋)이었으며 자는 가원(可遠) 또는 사숙(思叔)이요, 호는 양촌(楊村)이다. 고려 말 충주로 유배되어 와 양촌에 살았으므로 이를 호로 삼았다. 시호는 문충공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내용]
고려의 충신이었던 권근은 태조 이성계가 개국한 뒤에 데려가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태조는 한 동네에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던 권근의 아버지 권희를 통하여 권근의 출사를 종용했다. 이에 권희가 곧 서울에 올 것이라 꾸미고 사람을 보내 오기를 재촉하였다. 권근은 할 수 없이 충주 양촌에서 나섰고, 감사(현 도지사)는 떠났다고 장계를 올리고 곳곳에 장막을 치고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렸다.
태조가 손님 맞는 예로 편전에서 대접하고 팔도의 경치를 그린 병풍을 가리키면서 “어느 누각 어느 정자에 나를 위해 시를 지어 나라의 명승지를 자랑하게 하라”하니 권근이 물러 나와 지어 올렸다.
태조가 곧 권근에게 지제교를 임명하니 그는 어쩔 수 없이 명을 받고 나와 양촌으로 돌아가는 날에 상소를 올렸다. 고려조 정몽주는 충신이니 표창하고 증직을 내려 절의를 숭상하도록 간청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전해 들은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논박하였지만 태조는 권근의 말을 따랐다. 당시의 선비들이 권근을 종주로 간주하였는데, 이 일이 있은 후로는 모두 머리를 돌리고 침을 뱉었다 한다.
권근의 형인 권충(權衷)이 “자식이 있어서 불효하면 불욕이지만 나라에 불충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니, 나 하나의 체면만 내세워 세속적인 것에 급급하면 어쩌나(有子不孝不辱 事君不忠國亡 吾何面目立於世乎)”하고 충고하여 권근이 출사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조선 초 공신으로서 안동권씨 중 두각을 보인 권근의 출사 이야기로 새 왕조가 들어서면서 나타난 옛 왕조의 절개를 지키려는 신하들과 새 왕조를 위해 일하려는 신하들의 대립이 드러나 있다. 권근의 묘가 음성에 있고 일족이 살고 있어서 자연스레 음성 지역에는 권근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