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2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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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음역 | Yugyo |
영어의미역 | Confucianism |
이칭/별칭 | 유학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조현범 |
[정의]
강원도 강릉 지역의 유교 관련 문화유산의 총칭.
[연원]
강릉의 종교사에서 유교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강릉향교의 건립 때부터이다. 1313년(충선왕 5)에 강원도 존무사(存撫使) 김승인(金承印)에 의하여 화부산(花浮山) 기슭에 강릉향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물론 그 보다 앞서 200여 년 전에도 이미 향교가 있었다고는 하나 문헌상으로 자세한 고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강릉 유교의 역사는 강릉향교의 건립부터 출발해야 한다.
원래 향교의 기능은 석전(釋奠)을 통해 유학이 존숭하는 성현들에게 제향을 올리는 일과 장래에 국가의 재목이 될 학생들을 교육하는 일, 그리고 지방의 풍속을 교화하는 일이다. 따라서 향교는 유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사회질서를 구현하려는 노력을 지방의 향촌사회에까지 파급시키는 중요한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강릉향교가 강원도는 말할 것도 없이, 전국적으로도 아주 이른 시기에 설립되었다는 것은 강릉 지역의 유교역사가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강릉 지역에 언제 누가 유교경전에 담긴 가르침들을 보급하였는지에 대한 자초지종은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문과급제자 가운데 강릉 출신이 25명 정도나 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조선왕조가 개국되던 초기에 이미 강릉 지역에는 유교를 숭상하는 학자들이 상당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변천]
이후 조선시대 강릉의 유교는 1556년(명종 11)에 오봉서원(五峰書院)이 건립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오봉서원이 세워지기 전에 전국에 산재해 있던 서원들로는 1528년에 설립된 경상도 성주(星州)의 천곡서원(川谷書院), 1534년에 설립된 전라도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 1543년에 설립된 경상도 순흥(順興)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1549년에 설립된 황해도 해주의 문헌서원(文憲書院), 1552년에 설립된 경상도 함양(咸陽)의 남계서원(藍溪書院) 그리고 1555년에 설립된 영천(榮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 6개소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강릉 지역에 서원이 건립된 것은 상당히 이른 시기였으며, 이를 계기로 강릉 지역에 사림세력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오봉서원이 건립되던 무렵은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회에서 시작하여 1546년(명종 원년)의 을사사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네 차례의 사화를 거친 시기였다. 이에 도학적 세계관을 직접 정치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열망을 품었던 사림세력들은 혹독한 사화로 된서리를 맞으면서 향리로 돌아가 서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따라서 서원은 현실 정치에서 뜻을 접은 선비들이 은거하여 유교의 기본사상인 수기치인의 정신에 입각하여 수신하면서 성현의 경전을 공부하고 제자들을 배출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영동지방의 한적한 고을이었던 강릉도 서원의 건립을 계기로 유교적 이상세계를 향촌의 사회질서에 적용하려는 이상적인 실험장소로 간주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강릉의 유학자들은 일찍부터 유교의 근본적인 윤리준칙인 오륜(五倫)의 실천을 수령에서부터 각 문중과 일반 서민층에까지 파급시키기 위하여 향촌의 자치규약인 향약을 보급하였다. 강릉 지역에 향약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은 1600년(선조 33) 최운우(崔雲遇)에 의해서 시행된 연곡향약(連谷鄕約)으로 되어 있다. 연곡향약은 조선조 유림에서 향약의 원형으로 여겼던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강릉 지역의 특성에 맞게 그 시행규칙을 구체적으로 가감한 것이었다. 최운우의 연곡향약은 율곡이 만든 향약들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연곡향약의 입안자였던 최운우와 율곡 이이가 도의지교를 맺은 사이이기도 하였거니와 근본적으로는 여씨향약의 근간을 그대로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강릉에서는 1644년 7월에 전임 목사였던 이상겸과 전임 직장 김충의, 그리고 진사 박진계, 선비 최언기 등이 주축을 이룬 180여 명의 유생들이 발의하여 당시 부사 강백년의 협조를 얻어서 향현사(鄕賢祠)를 건립하였다. 강릉 향현사에 배향된 사람은 모두 12명으로, 최치운(崔致雲), 최응현(崔應賢), 박공달(朴公達), 박수량(朴遂良), 최수성(崔壽峸), 최운우, 최수(崔洙), 이성무(李成茂), 김담(金譚), 박억추(朴億秋), 김윤신(金潤身), 김열(金說) 등이다. 강릉 지역에 향현사가 건립되었다는 것은 강릉의 유교역사에서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향현사의 건립은 강릉 지역에서 배출된 뛰어난 인물들을 널리 현양하려는 의지를 담은 것으로, 강릉 지역의 유림집단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결집시키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향현이란 그 지방에서 배출한 뛰어난 인물로서, 유교의 옛 성현들과 선생들을 존숭하고 도의정신을 실천하여 그 덕망이 후세의 귀감이 되는 유현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유교는 지역민들을 교화하고, 유교적 소양을 지닌 후학들을 육성하는 등 강릉 지역의 향촌 사회를 지탱하는 큰 축이었다. 하지만 개항 이후 근대사회가 형성되면서 유교는 과거의 영향력을 점차 상실해 갔다.
[현황]
2005년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집계된 강릉시의 유교인구는 총 749명에 불과한 수준이다. 그나마 1995년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자신의 종교를 유교라고 응답하였던 사람이 1,494명이었음을 감안할 때 크게 줄어든 수치이다. 남녀 성별로 보면, 749명 가운데 남자는 401명이고, 여자는 348명이다. 연령별로는 40대 이상이 574명으로 76.6%를 차지한다. 이 같은 비율은 개신교와 천주교를 통칭하는 기독교나 불교의 종교인구 비율과는 달리 노년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세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합리주의와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산업화는 전통적 가치관, 특히 유교적 덕목과 유교식의 문화·관습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사회제도와 문화의 합리화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런 이유로 유교는 조선시대에 예교주의 국가이념을 뒷받침하는 지고의 가치체계로서 누렸던 특권적인 지위를 상실하였다. 게다가 근대국가의 기본원리인 정교분리의 원칙 하에서 유교는 여타의 종교들과 함께 가칭 종교시장 내에서 대중의 종교적 욕구에 부응하는 종교성을 상품으로 제공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 같은 이유들로 인해 현대 한국 사회에서 특정 종교단체로서 유교의 위치는 점점 더 열악해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강릉시의 유교인구는 춘천시의 유교인구가 336명, 원주시의 유교인구가 263명인 것에 비하면 월등히 많은 편이며, 나아가서 강릉시는 강원도 내에서 유교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이것은 강릉 지역이 유교문화권의 뿌리가 매우 깊은 지역이며, 산업화 과정에서도 전통적인 삶의 양식과 가치관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