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복회 군자금 조달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418
한자 大韓光復會軍資金調達事件
이칭/별칭 대한광복회 군자금 모집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종결 시기/일시 1920년 8월 - 허병률 체포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박상진|허병률|조선국권회복단|대동청년당|대한광복회

[정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전개한 대한광복회의 군자금 모집 활동.

[개설]

대한광복회는 1913년 경상북도 풍기(豊基)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이 중심이 되어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창립되었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함과 동시에 만주의 독립군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 등을 통해 무력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는 정미업을 경영하던 허병률(許秉律)[1885~1943]이 1917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920년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역사적 배경]

대한광복회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그곳에서 양성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본과 독립 전쟁을 수행할 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한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농토를 개간해 식량과 병력을 공급하면서 다양한 투쟁 방략을 펼치는 데 필요한 재원 확보라는 과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경과]

1910년대 경상북도 영주에서 채기중(蔡基中)을 단장으로 하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이 결성되었다. 채기중 등 풍기광복단의 일부 인사들은 박상진(朴尙鎭)을 중심으로 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들과 연합하여, 1915년 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하여 200여 명의 단원들로 구성되었다. 주요 활동으로는 군자금 확보를 위한 상동·직산 광산 습격과 경주 우편마차 습격, 1916년 9월 친일부호 서우순의 금고를 탈취하려 했던 대구권총사건 등을 펼쳤다. 또 반민족 행위자 처단을 위해 1917년 11월 경북관찰사를 지낸 장승원(張承遠) 처단, 1918년 1월 충남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 처단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1918년 11월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던 단원 권영묵(權寧黙)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무너져 갔다.

경산(慶山) 출신으로는 경산에서 정미업을 경영하던 허병률이 크게 활동하였다. 허병률은 1917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아울러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革命基地)를 거점으로 적절한 시기에 일어나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본회의 목적에 공감하고 적극 활동하였다.

허병률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치던 중,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되고 동지들이 붙잡히자 피신하였다. 1918년 4월 중국 상하이로 옮겼다가 1920년 1월 군자금 모집 임무를 띠고 국내에 들어와 서울에서 활약하던 조한명(趙漢明)·이동찬(李東燦)·박용선(朴容善) 등과 같이 서울과 원산(元山) 등지를 돌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0년 5월 서울의 부호 엄홍섭(嚴弘燮)을 총기로 위협, 군자금 2만원을 징수하여 상하이로 보내기도 하였다.

[결과]

1920년 8월 허병률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경산 출신 인사의 대한광복회 군자금 모집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의의와 평가]

경산 출신의 허병률이 참여한 대한광복회 군자금 조달사건은 1920년대의 광복단결사대(光復團決死隊)와 주비단(籌備團) 등의 비밀결사 조직과 의열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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