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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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山邑萬歲示威運動 |
영어공식명칭 | March 1st Movement at Gyeongsan-eup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3월 7일 - 경산읍 만세시위운동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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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독립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최상원|전덕수|서성오|계성학교 |
[정의]
1919년 3월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계획하였던 독립만세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부터 전개된 3·1운동은 경상북도 경산(慶山) 지역으로도 파급되었다. 이 무렵 경산에서는 대구 사립계성학교(私立啓聖學校) 출신 전덕수(全德洙), 경산 삼북동 교회 목사 서성오(徐聖五) 등이 1919년 3월 11일 경산읍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던 중 기밀 누설로 실패하고 말았다.
[역사적 배경]
1910년 국권피탈 이래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도 종래의 국권회복운동의 불씨를 지켜가던 중 1919년 1월 미국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사조와 일본 동경(東京)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및 고종 독살설 등의 영향으로 항일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만세시위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경산 지역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계획되었다.
[경과]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때 경상북도 경산에서도 인근의 대구와 연계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7일 경상북도 경산군 경산면(慶山面) 중방동(中方洞)[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 출신의 전덕수(全德洙)는 경산면 삼북동(三北洞) 교회 목사 서성오(徐聖五)와 함께 대구 사립계성학교(私立啓聖學校) 교사 최상원(崔相元)을 찾아갔다. 최상원은 1912년부터 계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대구 지역 3·1운동 계획과 준비 당시에 계성학교 학생 동원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전덕수가 서성오 목사와 함께 찾아간 최상원은 전덕수의 모교 은사였다. 전덕수는 모교 은사 최상원으로부터 경산의 만세시위에 대한 권고와 함께 매수는 확인할 수 없지만 독립선언서도 받아왔다.
한편 같은 날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 학생 김무생(金武生)이 모교 은사 최상원을 방문하였다. 경산군 고산면(孤山面) 사월동(沙月洞)[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사월동] 출신인 김무생(金武生)은 평양에서 대구 큰장[서문시장] 만세운동 계획 소식을 듣고, 3월 6일 오전 평양을 출발하여 3월 7일 대구에 도착하였다. 김무생은 대구 대남여관(大南旅館)에서 은사 최상원을 만나 ‘대구 3·1운동’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전덕수와 김무생은 같은 경산 출신이고, 또 1911년 계성학교 입학 동기생으로 확인되지만, 전덕수와 김무생의 만남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덕수는 경산으로 돌아와 서성오 목사와 더불어 3월 11일 경산읍 장날 장터에서 군중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전덕수는 만세운동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먼저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 동창주재소(東倉駐在所) 순사 김상훈(金相勳)에게 경산에서 계획하고 있는 만세운동에 협조해 줄 것을 권유하는 편지를 썼다. 전덕수는 자신의 매부인 김상훈에게 민족적 양심으로 돌아와 줄 것을 권고하였다. 또 경산면 삼남동(三南洞)[현 경산시 삼남동] 방한규한약방(方漢奎韓藥房)에서 김자숙(金子淑)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3월 11일 경산읍장 만세운동에 참가하도록 권유하였다.
[결과]
경산읍 만세시위운동은 준비 단계에서 기밀 누설로 관련 인물들이 경산경찰서에 구속되어 좌절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경산 지역의 만세시위운동은 계획 단계에서 좌절되고 말았지만, 전 민족적인 3·1운동 때 경산 지역의 인사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