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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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一然 |
영어공식명칭 | Ilyeon |
이칭/별칭 | 견명(見明),회연(晦然),목암(睦庵),보각(普覺),무극(無極),정조(靜照),원경충조(圓經冲照)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위은숙 |
[정의]
고려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승려.
[개설]
일연(一然)[1206~1289]은 가지산문(迦智禪門)의 선승(禪僧)이다. 무신집권이 끝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난 후 국왕의 부름을 받았다. 충렬왕 대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 교계를 주도하였다. 만년에는 삼국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집적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하였다.
[활동 사항]
일연의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장산군(章山郡)[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의 향리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김언정(金彦鼎)이다. 1219년(고종 6) 가지산문 계열인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로 구족계를 받았다. 1227년(고종 14) 승과(僧科)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다. 그 후 비슬산의 여러 사찰에서 주석(住錫)하였다. 1236년(고종 23) 삼중대사(三重大師), 1246년(고종 33) 선사(禪師)의 승계(僧階)를 받았다.
일연은 1249년(고종 36) 최우(崔瑀)의 처남이었던 정안(鄭晏)의 초청으로 남해 정림사(定林寺)와 지리산 길상암(吉祥菴)에 거주하면서, 가지산문과 수선사(修禪社)가 교류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같은 해 몽고족의 침입이 지속되는 가운데 남해 분사도감(分司都監)에서 대장경 간행에도 참여하였다.
일연은 1259년(고종 46) 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받았다. 1261년(원종 2) 원종의 명으로 강화도 선월사(禪月寺)에 주석하였으며, 1276년(충렬왕 2)까지 경상도 오어사(吾魚寺)[포항], 인홍사(仁弘寺)[달성], 운해사(雲海寺)[구미], 용천사(湧泉寺)[청도]에 주석하였다. 1268년(원종 9) 조정에서 베푼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에서 선종·교종 승려들이 주맹(主盟)으로 모시면서 고려 불교 교단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일연은 1277년(충렬왕 3) 충렬왕의 명으로 1281년(충렬왕 7)까지 운문사(雲門寺)에 주석하였는데, 이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충렬왕이 일본 동정군을 격려하고자, 경주에 행차했을 때 부름을 받기도 하였다.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초청으로 개경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면서 왕에게 선(禪)을 설하였으며, 1283년(충렬왕 9)에는 국존으로 책봉되었다. 1284년(충렬왕 10) 하산소(下山所)로 정한 군위 인각사(麟角寺)에서 9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하여, 당시 교권을 장악했음을 보여 주었다.
[사상과 저술]
일연의 저서로는 『화록(話錄)』 2권, 『게송잡저(偈頌雜著)』 3권, 『중편조동오위』 2권, 『조파도(祖派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그리고 역사서인 『삼국유사』 5권 등이 있다.
일연의 저서 중 『삼국유사』는 주제에 따라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내용은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기사들이 많지만, 삼국 시대 역사뿐만 아니라 불교 철학과 국어·국문학적 가치도 매우 크다. 일연은 혜심(慧諶)의 『선문염송집(禪門念頌集)』을 통해 간화선(看話禪)에 심취하였으나 수선만을 고집하지 않고, 경전은 물론 유가나 제자백가에도 능통하여 사상적 포용성을 가졌다. 그러한 사상적 경향이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를 찬술한 학문적 배경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묘소]
1295년(충렬왕 21) 일연이 입적한 군위 인각사에 보각국사탑(普覺國師塔)과 비(碑)를 세웠다. 비문은 왕명으로 민지(閔漬)가 썼다.
[상훈과 추모]
일연은 1283년 국존에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의 호를 받았다. 1284년 일연의 어머니가 타계하자 충렬왕은 군위 인각사를 하산소로 내리고 토지 100경을 하사했다. 또 일연이 입적한 후에는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탑호는 ‘정조(靜照)’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