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763
한자 白南埰
영어공식명칭 Baek Namchae
이칭/별칭 성숙(聖淑),석천(石泉)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8년 1월 1일연표보기 - 백남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백남채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백남채 대구학교 평의회 의원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백남채 제헌국회의원 당선
몰년 시기/일시 1951년 10월 2일연표보기 - 백남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백남채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85년 - 애국지사 석천백남채장로묘 묘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백남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백남채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송림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백남채 거주지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156-8
거주|이주지 백남채 거주지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465
학교|수학지 백남채 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로 181
학교|수학지 백남채 학교 - 중국 베이징
활동지 백남채 활동지 - 경상북도 대구부 일원[현 대구광역시 중구 일원]
묘소 백남채 묘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 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계성학교 교사|제헌국회의원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백남채(白南埰)[1888~1951]는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로 재직하던 중 대구 지역의 개신교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1919년 3월 8일 큰장[서문시장]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가계]

백남채의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성숙(聖淑), 호는 석천(石泉)이다. 1888년 1월 1일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송림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백용규(白龍逵)이며, 어머니는 순흥 안씨 안순이(安順伊)이다. 4형제 중 장남이다.

[활동 사항]

백남채는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하였다. 성장하면서 대구의 사립 계성학교에 입학했다가, 1910년경 중국 베이징의 협화대학으로 유학하였다. 계성학교 학적부(學籍簿)에는 재학 중에 북경신학교(北京神學校)로 전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귀국한 뒤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 등과 함께 교남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18년 4월부터는 대구부 남산정(南山町)[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주소를 두고 계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1월 5일 부해리(傅海利) 목사가 운영하는 남산교회 장로가 되었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15일 중국 상하이 신한청년단에서 특파된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順愛)가 백남채를 방문하였다. 이어 2월 24일에는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이자 대구·경북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 책임자인 이갑성(李甲成)이 방문하여 국내외 정세를 알려주며 대구에서도 궐기할 것을 권유하였다. 곧이어 세브란스 전문의학생 이굉상(李宏祥)이 독립선언문 200매를 가지고 와 이만집 목사에게 전달하였다. 독립선언문이 도착하자 1919년 3월 6일 백남채를 필두로 이만집·김태련, 계성학교 학감(學監)이자 신정교회 장로인 김영서(金永瑞), 동료 교사 최경학(崔敬學)·최상원(崔相元)·권희윤(權羲胤) 등이 상의하여 대구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어 백남채는 이만집·김태련·김영서·권희윤·정재순(鄭在淳)·정광순(鄭光淳)·최상원·최경학 등과 함께 대구 큰장[서문시장] 장날인 3월 8일 오후 1시에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주민과 학생 동원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였다. 백남채는 계성학교 학생 동원을 담당하였으며, 대구고보(大邱高普)·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에게도 연락하여 연합 시위를 전개하도록 주선하였다. 1919년 3월 6일 김태련 등은 이굉상이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크고 작은 태극기 40여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백남채는 계성학교에서 준비된 독립선언문을 학교 소사에게 맡겨놓았다가, 학생들을 통해 3월 8일 당일 군중들에게 배포하도록 지시하였다.

백남채는 독립만세시위 결정일 하루 전인 3월 7일 일본 경찰의 예비 검속으로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큰장에 집결한 1,000여 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종로와 동성로를 거쳐 달성군청 앞까지 행진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군경의 탄압으로 많은 부상자가 생기면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사전 예비 검속된 백남채는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겪고 1920년 7월 출감하였다. 그 후 베이징으로 가서 사원 30명 규모의 벽돌공장인 조선연와회사(朝鮮煉瓦會社)를 운영하면서, 그 이윤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조달하고, 모교인 계성학교 재정으로 지원하였다. 1922년에는 대구 청년운동의 중심지인 조양회관(朝陽會館) 건립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또한 1926년 희도보통학교(喜道普通學校)[대구종로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백남채는 1927년부터 1930년까지 ‘대구학교 평의회’ 의원이 되어 일제의 교육 정책에 타협하였고, 1936년에는 일제의 식민지배 말단기구인 남산정2구 총대를 역임하는 등 일제 식민지배에 편승하기도 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후 일제가 황국신민화정책의 일환으로 기독교대구연합회를 결성하자 일본인 위원장·부위원장을 도와 재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종교보국사상을 고취시키는 업무도 담당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경북치안유지회장, 경북도내무부장을 지낸 뒤, 1946년 이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참여하였다. 1947년 미군정 아래 과도입법위원, 1948년 5월 10일 한민당 소속 제헌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50년 민주국민당 후보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대구로 피난해 있던 중 1951년 10월 2일 폐암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묘소]

백남채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 산 206번지에 있다가 1992년 7월 8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백남채는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85년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 산 206번지에 묘비[애국지사 석천백남채장로묘]가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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