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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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年運動 |
영어공식명칭 | Youth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전개된 청년 중심의 사회운동.
[개설]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의식이 급격히 성장한 청년층은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새로운 모색으로 청년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청년단체 조직은 개항기 선각적인 유림의 맥을 잇는 청장년층의 자본가와 지주들의 지도하에 청년 지식인에 해당하는 실무 담당자 및 회원들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경산 지역에서는 1920년대 청년운동을 중심으로 노동운동·형평운동·소년운동 등의 사회운동이 나타났다.
[1920년대 전반 청년운동 단체의 조직]
경산 지역의 청년운동은 1920년 11월 16일 경산기독청년회(慶山基督靑年會) 창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21년에 자인청년구락부(慈仁靑年俱樂部), 1921년 10월에 경산청년회(慶山靑年會), 1922년에 자인청년회(慈仁靑年會), 1926년에 안심청년회(安心靑年會), 1927년에 하양청년회(河陽靑年會)와 하양여자친목회(河陽女子親睦會)가 차례대로 창립되었다. 경산기독청년회는 1921년 경산청년회로 발전하였고, 자인청년구락부는 1922년 자인청년회로 변경되었다. 이들 단체 중 경산 지역에서 청년운동을 주도했던 단체는 경산청년회였다.
1920년대 전반기까지 활기를 띠었던 경산청년회는 1920년대 중반 이후 노선을 전환하게 된다. 조선청년회연합회의 전국대회가 무산되자 사회주의 청년운동이 민족주의 청년운동을 압도해 나가게 되고,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으로 민족주의 진영의 청년운동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 운동의 급격한 발전에 따라 청년운동은 대중본위의 사회운동을 지향하였다. 경산청년회도 종래의 계몽적이고 문화운동적인 청년운동에서 대중본위의 사회운동을 지향하여 활로를 모색하였다.
한편, 1924년 5월 형평동진청년회(衡平同進靑年會)가 창립되면서 경산 지역의 형평운동을 전개하였다. 형평운동은 1923년 진주에서 시작된 백정 집단의 인권 존중과 신분 해방을 주창한 운동으로 전통 사회의 불평등한 질서를 청산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는 민권운동이었다. 이에 경산 지역에서는 1925년을 전후하여 경산형평청년회(慶山衡平靑年會)·자인형평청년회(慈仁衡平靑年會)·하양형평청년회(河陽衡平靑年會)가 조직되었다.
[1920년대 후반 청년운동]
1926년경부터 경산청년회를 사회주의 청년운동단체로 전환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는 가운데, 1927년 2월에는 무산계급(無産階級)을 위한 사회주의 사상운동단체로서 경우단(慶友團)이 창립되었다. 경우단은 경산청년회 활동이 침체된 이후 1927년 2월 경산 지역 무산청년(無産靑年)들이 조직한 사상 단체로 사회운동의 전위적 역할을 하였다. 경우단은 창립 이후 무산계급을 위하여 활동하면서 강연회(講演會)와 토론회(討論會)를 개최하며, 민중들의 지식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7년 6월 이후 조선청년총동맹이 전민족적 청년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함에 따라 경산 지역의 청년운동 단체들도 단일 청년동맹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이에 경우단 활동을 매개로 경산청년동맹이 결성되면서 경산 관내의 각 청년운동 단체들도 경산청년동맹의 지부로 전환하였다. 1928년 5월 11일 하양청년회가 경산청년동맹 하양지부, 6월 2일에는 안심청년회가 경산청년동맹 안심지부가 되면서 조선청년동맹의 청년운동노선에 따라 조직을 일원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