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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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김유신길 64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정환 |
[개설]
보련산(寶蓮山) 자락에 있는 보탑사(寶塔寺)는 당대의 장인(匠人)들이 지혜를 모아 만든 예술 작품이다. 도감(都監)을 맡은 대목수 신영훈을 비롯하여 도편수 조희환, 단청장 화사 한석성, 시공을 총 지휘한 한옥 전문가 김영일 등 ‘현대판 아비지’라고 할 만한 달인들의 혼과 열정이 배어 있는 건축물로 ‘준비된 국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강원도에서 자란 적송(赤松)으로 쇠못 하나 쓰지 않고 지은 순수한 목조 건물로, 황룡사 구층목탑 이래 1,300년 만에 재현한 삼국시대 목탑 형식의 건물이어서 건립 때부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기원하고 왜구와 대륙의 간섭을 떨쳐 버리고 독립 국가로서의 자주성을 공고히 하고자 황룡사 구층목탑을 세웠듯이, 21세기를 앞두고 조국 통일을 염원하고 아울러 전통 목조 건축 문화를 후세에 전하여 문화 민족의 긍지를 심어 주고자 이름도 통일대탑(統一大塔)으로 지었다고 한다.
[보탑사로 환생한 연곡사 터]
진천에서 청주로 이어지는 국도 17호선은 잣고개를 넘자마자 진천읍 사석리에서 천안으로 이어지는 국도 21호선과 만난다. 천안 방향으로 가다가 초원휴게소 사거리에서 두 시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김유신(金庾信) 장군 탄생지가 있는 상계리 계양마을의 담안밭을 지나고, 이곳에서 연곡저수지를 지나 연곡계곡을 따라 4㎞쯤 올라가면 길이 끝나는 곳에 보탑사가 있다.
진천읍 연곡리 비선골[일명 비립골]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연꽃골’로 기록된 곳으로 고려시대에 연곡사가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에서는 이곳을 부처당이라 불렀는데, 절터만 남아 있던 곳에 비구니 지광·묘순·능현에 의해 보탑사로 환생한 것이다.
1992년 창건 불사를 시작하여 1996년 8월 목탑을 완공하였고, 그 후 지장전·영산전·산신각 등을 건립하여 2003년 불사를 마무리하였다. 주변을 둘러싼 보련산 연봉들이 활짝 핀 연꽃 모양이라 하니 통일대탑은 연꽃의 한가운데 꽃술처럼 앉아 있는 셈이다.
『법화경(法華經)』 제11장 「견보탑품(見寶塔品)」에 따르면, 다보여래가 석가모니 부처의 법문을 증명하고 찬탄하기 위해 칠보탑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여 주는데,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보배탑을 세움으로써 모든 사람의 가슴에 부처의 자비심이 가득 차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보탑사라 하였다고 한다.
[탑 형식을 빌린 목조 건물]
불가에서 탑은 곧 사리[유골]를 안치한 무덤을 말한다.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의 팔상전(八相殿)은 땅으로 내려간 찰주 아래에서 사리가 확인됨으로써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보탑사의 중추인 통일대탑은 탑이 아니라 삼층탑 형식을 띤 목조 건물이다.
겉모습은 탑이지만 각 층마다 법당이 있는 다층집이며, 내부로 들어가 계단을 통해 3층까지 올라갈 수 있다. 시공을 총 지휘했던 김영일에 따르면, 일본의 목탑은 전각 기능을 하기에 곤란한 구조이고 중국 산시성[山西省]의 불궁사 오층목탑은 팔각탑이라서 참고할 수 없어 본보기를 찾아 헤맨 끝에 경주 남산 마애탑을 보고 본보기로 삼았다고 한다.
[통일대탑의 진면목]
흔히 사찰의 가람 배치는 불국토를 상징하는 여러 구조물들이 무명(無明)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순서대로 펼쳐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보탑사는 일반적인 산문(山門)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거의 파격에 가까워서 언뜻 보면 일주문도 없고 대웅전도 없는 듯하다.
절 한가운데 삼층목탑이 우뚝 자리를 잡고, 장군총의 모습을 재현한 지장전(地藏殿), 통나무에 너와지붕을 얹은 귀틀집 형식의 산신각, 부처와 10대 제자·16나한·500나한을 모신 영산전, 와불열반상을 모신 적조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세히 둘러보면 따로 있어야 할 대웅전, 법보전, 미륵전을 통일대탑 안에 기능적으로 다 담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일대탑은 목탑부 32.7m와 상륜부 10m를 포함하여 전체 높이는 42.7m로, 이는 13층 아파트와 맞먹는 높이이다. 29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목탑 내부는 2,0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실제로 준공식 때는 1,500여 명이 탑 안에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탑 속에 절이 들어 있다’는 표현이 실감 난다.
1층은 대웅전이다. 심주(心柱)를 중심으로 동방에는 약사유리광불, 서방에는 아미타여래, 남방에는 석가모니불, 북방에는 비로자나불을 사방(四方)으로 모신 보탑사의 금당이다. 지붕에는 수미산을 상징하는 999개의 백자탑을 난간에 배치하였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고구려 동명성왕 칠층목탑에서 오늘의 보탑사에 이르는 탑의 계맥(系脈)을 이웃나라 자료와 함께 정리해 놓았다.
2층은 법보전이다. 불법승 삼보(三寶) 중의 법보, 즉 석가세존의 가르침인 경전을 봉안한 법당이다. 중앙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모신 윤장대(輪藏臺)[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책장]를 중심으로 네 면에 방사선형의 서가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9t이나 되는 석경(石經)의 무게를 분산하기 위한 배려라고 한다.
서가에는 『팔만대장경』 번역본을 안치하고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한글 번역본 17만 자를 쑥돌에 새긴 석경을 봉안하였는데, 경판을 보존하는 처소란 의미에서 2층을 대장전(大藏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3층은 미륵전이다. 지금은 도솔천에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위해 설법하고 있지만 장차 이 땅에 내려와 새로운 정법 시대를 열게 될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본존불과 좌우 협시불이 각각 다른 화염무늬 광배를 갖고 있다. 화려한 광배 때문인지 후불탱화는 봉안하지 않았고, 머리 위로도 닫집 대신 금동으로 만든 간단한 보개(寶蓋)를 설치하였다. 보개에는 투각한 무늬 사이사이에 칠화(漆畵)로 그린 덩굴무늬와 비천상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각 층 사이에 또 다른 층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중간층을 암층(暗層)이라 한다. 암층은 기와지붕의 뒷부분에 해당하며 경사진 지붕 때문에 생긴 또 하나의 공간이다. 그러니 통일대탑은 실제 5층인 셈이다. 2층과 3층 외부에는 탑돌이를 할 수 있도록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미륵전 윗부분은 철제로 된 상륜부로, 문화재 철물 보수 기능자인 최교준의 지휘 아래 금속 공예 전문가 네 명이 매달려 완성한 작품이다. 상륜부 내부는 스테인리스 강관으로 심을 박아 힘을 지탱하게 하는 한편 바깥쪽은 순동으로 제작하였으며, 곳곳에 금도금한 연꽃무늬와 풍탁(風鐸)을 설치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녹스는 구리의 빛깔 속에 금빛이 돋보이도록 배려하였다.
주변의 보련산이 낮고 탑 높이가 높은 점을 감안하여 구리나 금보다 열전도율이 높은 백금으로 피뢰침을 만들었다. 전통 기술에 현대 과학을 접목한 창조성도 놀랍거니와 탑에 들인 정성과 세심한 배려는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또 하나의 걸작, 진천 연곡리 석비]
지장전 뒤편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진천 연곡리 진천 연곡리 석비[보물 제404호]가 있다. 전체 높이 3.6m에 몸돌 높이 2.13m이며, 귀부와 이수를 온전히 갖추고 있는 화강암 비석이다. 비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지 않아 일명 백비(白碑)라 불린다.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려고 하는 모습을 마치 살아 꿈틀대는 듯 조각한 이수가 일품인데, 조형 기법이 월광사(月光寺) 원랑선사비(圓郞禪師碑)의 이수와 비슷하다.
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 또한 금방이라도 성큼 앞으로 나설 듯 조각 솜씨가 생생하다. 새 시대의 여망을 담고 새 주인이 된 통일대탑의 위용도 감탄할 만하거니와,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 온 터줏대감으로 ‘말 못할 염원’을 담고 서 있는 백비의 서늘함 또한 그에 못지않은 걸작이라 할 만하다.
[꽃 피는 절, 보탑사]
보탑사는 고건축을 연구하는 학자나 학생들이 찾는 중요한 답사지이다. 또 만뢰산(萬賴山)에 올랐던 사람들이 하산 길에 들러 눈을 씻고 가는 휴식처이기도 하다. 더러는 옹기에, 더러는 돌그릇에 가꾼 꽃들이 철따라 어여쁜 자태를 뽐내는 걸 보노라면 ‘가장 예쁜 절’이란 찬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특히 3층 난간에서 바라보는 절 풍경과 연곡리 일대의 풍광은 가히 일품이다. 통일대탑 구경도 구경이거니와, 경내에 가득한 꽃을 보러 혹은 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마을과 함께, 주민들과 함께]
보탑사 입구에는 한눈에 보아도 참 잘생겼다 싶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령 300년을 헤아리며 진천군의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한여름에도 넓고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오가는 사람들의 땀을 식혀 주고 있다. 오랜 세월 마을의 희로애락을 지켜보아 왔을 테지만 지금은 마을의 수호신인지 절 앞을 지키는 수문장인지 구분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만큼 마을과 보탑사는 이제 한 몸이 되었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는 마을 노인들이 취나물, 고사리, 곤드레나물 등 주변 산에서 채취한 산나물과 약초 따위를 내어 놓고 절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데, 여타 번잡한 상가의 구색(具色) 없이도 시골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특히 최근에 마을 이장이 절 앞의 다랑이 논을 이용해 연밭을 가꾸어 연꽃마을의 정취를 한껏 살리고 있는 것도 보탑사와 함께 삶의 변화를 꾀해 보려는 노력의 일면이다.
한편 관광객이 날로 늘어나는 추세에 발맞춰 이를 감당할 만한 기반 시설을 갖추는 일은 주민들의 숙원(宿願)이 되었다. 주민들은 관광객이 통일대탑을 구경하고 마을에 좀 더 머물기를 바라지만, 그러기엔 밀려드는 자동차를 수용할 주차장도 열악하고 이렇다 할 식당이나 찻집도 전무한 실정이다.
진천군에서는 좁은 진입로를 넓혀 포장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지만 관련된 토지가 대부분 전의이씨(全義李氏) 문중 소유라서 협의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결국 통일대탑과 주민들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연꽃마을을 가꾸어 가는 것은 양 주체와 진천군이 함께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