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0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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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寺刹 |
영어의미역 | Temple |
이칭/별칭 | 절,사원(寺院),정사(精舍),승원(僧院),가람(伽藍)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상일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에 있는 부처를 숭상하고 불법을 익히는 장소.
[개설]
사전적인 의미에서 사찰은 석가모니 등 다양한 종류의 불상을 모셔 놓고 승려들이 거처하면서 불도를 닦아 수양하는 한편, 불교 교리를 설함으로써 불교 신앙을 전파하고 개인 또는 사회와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곳으로서 일반적으로 절이라고 하며 사원(寺院)·정사·승원(僧院)·가람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의 전도(傳道) 초기인 기원전 6세기 무렵, 인도의 출가자(出家者)들은 일정한 거처를 가지지 않고 독신 생활을 하면서 걸식(乞食)으로 수도 생활을 영위하였으나, 인도의 기후적 특성 때문에 우기(雨期)에는 바깥에 나가기보다는 한곳에 모여 수도에 정진(精進)하는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우기인 석 달 동안은 바깥출입을 삼가는 것을 계율(戒律)로 정하고 출가자들이 한곳에 모여 적절한 공동생활을 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안거(安居)할 만한 장소를 불교 신도들이 스스로 마련하게 되었다. 초기의 사찰은 처음에는 이처럼 단순한 공동 주거지 구실을 하다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종교 의례를 집행하는 성소(聖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진천군의 사찰]
한반도 남부의 중심이며 충청북도의 서부에 자리 잡은 진천군은 비교적 낮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어 명산대찰은 없으나 830년(흥덕왕 5)에 조각된 진천 태화 4년명 마애여래입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가 들어와 곳곳에 사찰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천군에 사찰을 세웠다는 문헌 기록은 없으나 현존하는 사찰 및 절터에 전해지는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가 세월의 변화에 따라 폐사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길상사(吉祥寺)·보적사(寶寂寺)·선적사(先寂寺)·편각사(片角寺) 등의 사찰이 진천 태령산(胎靈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고, 조선 후기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길상사와 영수사(靈水寺)만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영수사만 남아 있다.
[진천군의 사찰 현황]
현재 진천군에는 성림사(成林寺), 용화사(龍華寺), 대흥사(大興寺)[대각원, 영은암], 만성사, 영수사 등의 전통 사찰이 불법을 전하고 있다. 그 밖에 길상사[백련암] 터, 지장사 터, 대운사 터, 보살사 터, 선적사 터, 편각사 터, 옥성리 절터, 사곡리 절터, 연곡리 절터, 대문리 절터, 교성리 절터, 용정리 절터, 광혜원리 절터, 양백리 절터 등이 알려져 있다.
관련 불교 문화재로는 진천 사곡리 마애여래입상, 진천 산수리 마애여래좌상, 진천 노원리 석조마애여래입상, 진천 태화 4년명 마애여래입상, 진천 용화사 석조여래입상, 광흥사 석조여래좌상, 용화사 석조보살입상, 진천 지암리 석조여래입상, 부봉사 석조보살입상, 노원리 석조보살입상, 연곡리 절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삼용리 석조여래입상, 연곡리 삼층석탑, 지장사 터 부도, 진천 연곡리 석비, 「진천 영수사 영산회괘불탱」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