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3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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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陟頭陀山李承休遺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안로 816[내미로리 785] |
시대 | 고려 |
집필자 | 김도현 |
[정의]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안로 816 두타산에 있는 고려시대 문인이자 정치가인 이승휴 관련 유적.
[개설]
동안거사 이승휴는 삼척 지역에서 머무르는 동안 현재의 천은사 자리에 용안당, 지락당, 보광정, 표음정을 지어 삼화사에서 약 1000상자의 불경을 빌려 읽으며 『제왕운기』와 『내전록』을 저술하였다. 이후 1294년(충렬왕 20) 되던 해에 홀연히 용안당 간판을 간장사(看藏寺)[현재 천은사]로 개칭하고 승려가 주석할 밭을 희사하였다.
[변천]
이승휴는 고려충렬왕 때 고쳐야 할 폐단 10개 조를 올려 파직된 후 삼척에 내려와 두타산 자락인 구동, 즉 현재의 삼척시천은사 경내에 용안당을 비롯한 몇 가지 시설을 조성하여 10여 년 동안 머물렀다. 그가 남긴 유적은 2000년 9월 16일 사적 제421호인 ‘삼척두타산이승휴유허(三陟頭陀山李承休遺墟)’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삼척두타산이승휴유적(三陟頭陀山李承休遺蹟)’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적은 현재 천은사 경내에 위치하며, 주소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안로 816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이승휴 관련 유적을 찾기 위한 발굴 조사는 두 차례 실시되었다.
첫 번째 발굴 조사는 1998년 9월 20일부터 10월 19일까지 약 1개월 동안 관동대학교 박물관에서 삼척시 미로면 동안로 816두타산천은사 일원의 동안거사 이승휴 유허지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승휴 유허지로 추정되는 곳을 중심으로 용안당(容安堂), 지락당(知樂塘), 보광정(葆光亭), 표음정(瓢飮渟) 등을 찾기 위함이 주된 목적이었다.
발굴 결과 이승휴 선생과 관련하여 구체화된 직접 연관될 만한 유적 및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통방아 세 곳, 연못지 한 곳, 고려시대~조선시대 건물지 두 곳, 청자도요지 한 곳 등이 확인됨으로써 천은사 및 이승휴 관련 유적에 대한 역사성을 간접으로나마 해명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발굴조사는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2003년 12월에 발굴 허가를 받아서 12월 30일 동절기로 인하여 발굴을 중단하였다가 2004년 2월 24일 발굴을 재개하여 4월 24일까지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1차 조사 때 확인한 사각 형태로 알려진 연못지와 용안당 등의 건물지를 확인하기 위함이 주된 목적이었다.
조사 결과 연못지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었으며, 건물지는 계곡의 범람에 의하여 완전히 교란되어 구들 일부와 약간의 소토만이 조사됨으로써 건물지의 규모나 조성 시기 등에 관하여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적을 발굴하지는 못하였지만 문헌 검토를 통하여 천은사 권역이 이승휴가 은거하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한 장소임에는 틀림없다고 판단하였다. 연못지 또한 이승휴가 주석할 당시에 조성되었다는 유물이나 유적을 확인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당대의 연못지임을 증빙할 수는 없지만 기록에 보이는 사각형 못[방지(方池)]과 일정 부분 일치함으로써 전문가 조언을 거쳐 연못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음을 피력하였다.
[현황]
유적이 소재한 천은사는 본래 신라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사명(寺名)은 ‘백련대(白蓮臺) → 간장암[간장사] → 흑악사(黑岳寺) → 천은사(天恩寺)’로 변화되어 오늘에 이른다. 여기서 ‘간장암[간장사]’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이승휴의 「보광정기(葆光亭記)」와 「간장사기(看藏寺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승휴가 활동하던 시대는 기존의 귀족 문화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그때는 강계의 난, 몽골의 침략과 몽골에의 복속으로 인한 사회 변화 및 신분 계층 간 변동기에 중앙 관계로 진출하려는 일군의 사인(士人)이 있었다. 이들은 ‘능문능리(能文能吏)’의 교양과 능력을 토대로 사회 변혁에 부응하는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면서 그 시대를 계도해 간 신진사대부였다. 이승휴와 같은 초기 신진사대부는 유학 정신을 근간으로 삼고서 나아가서는 광세재민하고 들어와서는 수신제가하는 의식을 갖추었다.
삼척시 미로면 동안로 816 천은사 경내에 있는 이승휴 관련 유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지락당(知樂塘)
연못지를 지락당이라 하였다. 방당(方塘), 즉 네모진 형태를 갖추었다. ‘지락당’이란 명칭은 “나는 조그마한 연못을 만들어서 연꽃을 심고 물고기를 기르고 물고기는 붉은 연꽃과 푸른 연잎 사이에서 즐겁게 뛰노니 이곳이야 말로 저마다 자기 자리를 얻어서 물고기는 물고기대로 즐거움을 알고 나는 나대로 즐거움을 아노라”라는 장자 제물편의 말을 취하여 지었다고 한다. 사찰에 조성된 연못지는 대부분 연꽃을 심어 조경했는데 이곳에도 연꽃을 심었다고 한다.
전체로 볼 때 사각형을 띤 것으로 추정되는 연못지는 최대 장축이 동~서 14m와 남~북 16m, 면적은 약 224㎡[68평] 정도이다. 현재 남아 있는 호안 석축에 의한 연못지만이 확인되고 있다. 선대에 조성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호안 석축은 최대 높이가 2.2m 정도이다. 1.6m까지는 50.0m~80.0m의 석재를 사용하여 쌓은 것이 확인되고 있다. 또 아래층인 선대의 석축은 직사각형[장방형(長方形)]의 석재를 허튼층쌓기를 하면서 퇴물림 방식이 강하게 쌓았다. 반면에 후대에 쌓은 상위의 석축은 사각형에 가까운 석재를 허튼층쌓기 방식의 퇴물림 방식이 약하게 쌓았다.
현재 노출된 연못지의 바닥은 하상층의 자갈과 굵은 모래층으로 형성되었으며, 거대한 자연석재가 군(群)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다른 연못지에서도 볼 수 있는 조경석으로 놓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호안 석축은 동측만이 축성되었다. 외면에는 물이 새는 방지책을 마련하지 않고 내면에만 잡석으로 마감하였다. 호안 석축의 기단은 없으며, 하천의 지표 위에 자연석을 그대로 쌓는 방식을 택하였다. 남측은 자연석이 연못지를 향하여 비스듬히 놓여 자연벽을 이루었으며, 서·북측은 하상층의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지면서 거대한 바위가 호안(湖岸)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입수구는 별도의 시설이 되지 않고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유입수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출수구도 별도의 시설이 보이지 않는다. 출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측은 어느 시기엔가 붕괴되어 작은 자연석으로 다시 쌓은 것으로 보인다.
2. 청자 도요지
청자 도요지는 현 주지스님 거처인 용안당 건물 뒤편의 동북쪽으로 나있는, 당시의 암자인 화엄암과 부도군으로 올라가는 길 좌측편인 산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가마 유구는 전체 한 곳으로 북서-남동향의 자연 경사면과 같은 방향으로 시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구는 길이 남-북 320.0㎝ 및 동-서 440.0㎝ 규모로, 평면 장타원형의 소규모 가마이다.
가마의 벽체는 대부분 유실되어 온전하게 남아 있지는 않지만 현존하는 북벽은 2~3단 정도의 높이 66.0㎝로 벽체에 사용된 석재들이 조금 남아 있는 편이다. 남벽은 거의 유실되어 윤곽선만 남아 있다. 서벽은 두께 38.0~54.0㎝와 높이 38.0㎝로, 모서리 부분의 석재들은 불 먹은 흔적이 완연하다. 입구부는 대나무숲과 계곡에 바로 접하고 있는 관계 때문에 확인을 하지 못하였지만 대부분의 유물과 소토가 입구쪽과 소성실 중앙부에서 확인되었다.
이 가마는 외형상으로는 규모가 디소 작은 장타원형으로 된 가마이다. 그 구조는 소성실이 1개인 단실요이며, 바닥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지하면을 약간 파서 조성하였다. 천장은 남아 있지 않지만 등요와 같은 지상 토축일 가능성이 짙다. 소성실의 바닥면은 진흙을 깔아 처리하였다. 경사는 거의 없는 편이고, 고온의 불길이 닿아 다소 굳게 익은 상태로 확인되었다. 이 청자요 유구의 원형이 대부분 상실된 관계 때문에 그 구조의 정확한 양상은 밝힐 수 없지만 지금까지 강원도 지역에서 확인된 최초의 청자 가마터라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수습된 유물로는 대접이 가장 많았다. 그 외의 접시, 완, 도지미 등이 있었다. 이들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이 가마는 12~13C에 사용한 가마로 추측된다. 이것으로 보아 이승휴가 이곳에 용안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불경을 읽는 등 불교에 심취해 있을 때도 사용된 가마로 추측된다.
3. 용안당(容安堂)과 보광정(葆光亭)
이승휴가 주석할 당시에 만들었다는 용안당과 보광정 터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간장사기」를 통하여 이승휴가 주석한 용안당이 간장사, 즉 현재 천은사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과 고지도(古地圖) 등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천은사는 이승휴 관련 유적과 함께 신라 최전성기 양식을 계승한 유물인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 고려 후기 단아 양식의 불상을 계승한 조선 전기 불상인 목조아미타삼존불(木造阿彌陀三尊佛), 조선태조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이안사 부모를 모신 준경묘·영경묘의 조포사(造泡寺)로 기능하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용안당·보광정에 대하여 『동안거사집』의 「보광정기」에 실려 있는 관련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두타산(頭陀山)의 중대동(中臺洞)은 기이하고 절묘하여 신기한 경치를 다 드러냈고, 묶어 놓은 듯도 하고 편편하기도 하며 옹기종기 땅을 응축해 놓은 듯한 곳이다. 게다가 거닐고 의지하기 편하니 그 아름다움을 이루 다 형용하기가 어렵다. 만일 동파가 이곳을 본다면 의당 서시로 비교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 노닐며 구경하는 운치는 곧 십사관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중대동의 동북쪽으로 하나의 봉우리가 홀로 솟아 머리처럼 생기어 펑퍼짐하게 흘러내리는 산봉우리가 있으니 그것은 대문수라 부르고, 대문수 남쪽에 솥발처럼 솟아 일어난 것이 훌쩍 날아오르는 듯한 것은 삼공봉이고, 비스듬히 경계진 양쪽 골짜기 사이에 돌고 굽이져서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포포천이다. 내의 북쪽 문수봉에 딸린 겹친 산언덕이 있는데 이곳은 삼공봉을 바라보고 있으며, 우묵하고 널찍하여 물이 안고 도는 곳으로 특별히 하나의 작은 구역을 이루고 있느니 이곳이 구산동이다.
구산동을 가로질러 서북쪽에서 동남으로 콸콸 흘러가는 물줄기가 용계이다. 용계를 따라 양쪽 가에 밭 이경이 있으니 이것은 동안거사 외가에서 전해 오는 토지이다. 땅은 비록 메마른 박토이지만 몇 식구의 집안이 의지해서 먹고 살 만하다. 이에 시내 서쪽 밭의 잘록한 언덕 위에다 집을 짓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심용슬지이안(審容膝之易安)’이란 구절의 글귀를 취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하였다.
용안당 남쪽에는 차가운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샘이 있는데 가물어도 더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많아지지 않으며, 차고도 차가워서 시원한 기운이 사람을 엄습하여 손으로 움키기도 전에 몸이 이미 청량해진다. 그로 인하여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섞어 심고 화초를 빙 둘러 심어 놓으니 비록 소박하여 화려하지는 않지만 누추한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남화진인의 제물편에 나오는 글귀 “물은 주입해도 가득해지지 않고, 퍼내도 마르지 않으며, 그 나오는 근원을 알 수가 없는데 이것을 보광이라 한다.”를 취하여 이름을 ‘보광정’이라 하였다.
4. 표음정(瓢飮渟)
이승휴가 주석할 때 만들었다는 표음정 터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에 대하여 『동안거사집』의 「보광정기」에 실려 있는 관련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보광정 가운데에 엷은 돌을 깔아 자리를 만들고, 그 가운데 작은 우물을 파서 음식 짓는 데 쓰일 수 있도록 해 놓고 설당거사소동파의 전중시 “한 번 배부름은 기약할 수 없으나 한 바가지 물은 기필할 수 있다.”라는 시구를 취하여 ‘표음정’이라 하였다.
천은사 경내는 아니지만 삼척 지역 내 이승휴 관련 유적은 그가 머물러 있던 용안당에서 삼화사로 불경을 빌리러 다닌 옛길인 ‘돌머들-흥태골-저수 고개[지시 고개];국시-작은 당골[고양뎅이·횟골]-서낭댕이-정거리-옛 삼화사 터’, 그에게 불경을 빌려 준 삼화사, 안집사 병부시랑 진자사(陣子俟)와 함께 죽서루에 올랐다가 판상의 시를 차운하여 시를 쓴 죽서루,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여 지역 주민들과 함께 입보한 ‘요전산성’이 있다.
그리고 1995년 천은사 경내인 지락당 터 옆에 이승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동안사(動安祠)’를 건립하였고, 이후 이승휴 선생을 기리는 동안대제를 매년 10월 3일 이곳에서 봉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각종 자료와 유적, 그리고 이승휴가 용안당(현재 천은사)에서 쓴 『제왕운기』를 통하여 이승휴는 평생 사대부 의식을 내면에 깊이 새겨 실천을 중요시한 지식인[사인(士人)]이었으며, 그의 경험과 학문을 바탕으로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고 민족을 생각하였으며, 불합리한 것을 개혁하려는 시대정신과 선각자로서 행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는 적극 태도에 기반을 둔 종교인으로서의 실천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