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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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陟濬慶墓永慶墓 |
영어공식명칭 | Samcheok Jungyeongmyo and Yeonggyeongmyo Tomb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준경길 333-360[미로면, 준경묘 사당]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도현 |
[정의]
강원도 삼척시 준경길에 있는 태조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 장군과 부인 묘.
[개설]
조선 고종 때인 1899년(광무 3년) 4월 16일 고종이 태조이성계의 5대조인 양무 장군과 그 부인묘를 선조의 묘로 공식 추봉(追封)하고 묘호(廟號)를 준경(濬慶)과 영경(永慶)으로 하여 수축한 것이 강원도 삼척시 준경길 333-360에 있는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이다.
1899년 준경묘와 영경묘를 수축하여 묘역의 경계를 정하여 비(碑)를 세우고 재사를 건립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해당 묘역(墓域), 재실(齋室), 목조대왕 구거유지(舊居遺址) 등을 묶어 지방기념물 제43호[1981.8.5지정]로 지정·보존되다가 2012년 7월 12일 문화재청 고시 제2012-75호를 통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24호로 승격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삼척 준경묘·영경묘 수축 과정과 주변 지역의 인력·물자 동원 현황은 『조경단준경묘영경묘영건청의궤』,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고종실록』에 실려 있는 내용 중심으로 수축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종은 삼척 노동과 동산에 있는 두 자리의 무덤이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실려 있는데 여러 선대 임금들 시기에 일찍이 고쳐 봉토함에 대한 의견이 많았으며, 여러 차례 살펴보도록 한 지시도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직접 살피고 온 재상의 보고와, 『여지승람(輿地勝覽)』과 『읍지(邑誌)』에도 역시 확실한 근거가 있는데 묘에 대한 의식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거행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반성하며 이를 수축할 것을 공식 지시하게 된다.
이에 고종은 노동의 무덤 이름은 준경묘로 부르고 동산의 무덤 이름은 영경묘로 부를 것을 명함으로써 현재까지 이와 같이 불리고 있다. 이와 함께 무덤 구역을 한정하고 비를 세워 관리를 두고 재실을 세우는 등의 일을 영건청(營建廳)에서 거행하도록 지시하면서 “준경묘와 영경묘 두 무덤의 비석 앞면 글은 내가 직접 쓰고 뒷면 글도 직접 지어서 내려보내겠다.”라고 하였다. 또 “궁내부 특진관 이중하를 영건청 당상관, 삼척군수 이구영(李龜榮)을 당하관으로 다 함께 추가 임명하여 급히 준경묘와 영경묘에 달려가서 그들이 감독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지시함으로써 준경묘와 영경묘 수축이 공식으로 이루어진다.
풍수지리 입장에서 지금까지 준경묘와 영경묘에 대한 이해는 준경묘와 영경묘가 위치한 미로면 활기리와 동산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조선 왕조를 창업한 토대가 된 지세를 거시 이해하는데 약간의 한계가 있었다고 보인다.
이에 준경묘와 영경묘는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산경표와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한민족의 활동 무대 근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의 정기를 백두산으로부터 받고 금강산과 오대산을 지나 두타산에 이르러 분리되면서 그 지세를 동쪽으로 틀어 왕조 창업의 토대가 되었다는 거시 관점도 함께 지닐 필요성이 있다.
산경표에 언급된 백두대간의 지맥과 『고종실록』, 그리고 어제준경묘비·어제영경묘비에 언급된 풍수상의 특징, 현장에서 확인한 바에 의해 이곳 활기리 노동의 준경묘와 하사전리의 영경묘는 조선 왕조의 탄생과 관련한 기본 토대가 된 풍수상의 지세를 지닌 곳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 왕조의 왕릉들이 모두 백두대간에서 뻗어져 나온 정간이나 정맥의 자락에 위치한 데 비해 준경묘와 영경묘는 백두대간의 주 능선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이어진 곳에 위치하였다는 점에서 그 땅 기운의 정도는 다른 왕릉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함께 구거 유지에 대한 언급 또한 허목(許穆)[1595~1682]의 『척주지』, 『여지도서』에서도 당시 사람들이 왕기가 서린 곳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이미 이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회자되었음에도 이에 대한 소개없이, 언제부터 전해졌는지 언급이 전혀 없는 구전 설화로만 이해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위치]
준경묘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준경길 333-360, 영경묘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영경로270에 각각 있다.
[변천]
이미 조선 전기부터 묘역 수호 활동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였음은 삼척 지역과 관련한 각종 읍지나 다음과 같이 지리지에 전하는 양묘 관련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삼척 읍지에 “목조(穆祖)의 부친 묘는 부(府) 서쪽 40리인 노동(蘆洞)에 있고, 모친 묘는 부 서쪽 30리인 동산(東山)에 있다.”라고 기술된 이래 삼척 지역 향리 출신인 김윤직(金允直) 개인이 보관하고 있는 옛 문서에 1447년(세종 29) 감사 이심(李審)에게 명하여 분묘가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하였다. 옛일을 잘 아는 노인 고봉생(高奉生), 조흥보(曺興寶) 등이 “목조 부친의 묘는 노동에 있고 모친의 묘는 동산에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목조 부모 묘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며, 그 자세한 위치가 삼척부의 노동과 동산이라고 확인하였다.
이와 같은 위치 확인을 바탕으로 1490년(성종 21) 강원도에 명하여 봉역(封域)을 수축하도록 하였다가 곧 공사를 중지하라 하였고, 명종대에 감사 윤인서(尹仁恕)의 장계(狀啓)로 매년 봉심하기로 하고 수호군(守護軍) 8명을 정하여 토지 1결(結)을 지급하였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묘역 수축과 봉심을 위한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580년(선조 13) 감사 정철(鄭澈)[1536~1593]의 장계에 따라 수호만 하라 하였고, 1610년(광해군 2)에 감사 신식(申湜)[1551~1623]에게 명하여 봉심토록 하였으나 노동의 묘가 황지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봉심하는 예가 폐지되었다.
이후 1781년(정조 5) 감사 김희(金熹)[1729~1800]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봉심하였다고 한다.
감사 손순효(孫舜孝)[1427~1497]의 양묘기(兩墓記)를 보면 “계유년[1393년(태조 2)]에 어향(御鄕)이라 하여 서대(犀帶)를 군사(郡司)에 하사하였는데 아름다운 천막을 치고 매년 삼명일(三名日)에 제사를 지내고는 곧 거두어들여서 보관하였다.”고 하였다. 즉 조선 전기에는 매년 격식을 갖추어 세 차례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의 장소나 절차 등은 자세하게 알 수 없다.
수호군과 관련한 자세한 기록도 이중하(李重夏)[1846~1917]가 정리한 『삼척양묘지』에 보인다. 1581년(선조 14) 12월 목조 부친 능에는 백성 심내은(沈內隱)과 김억주(金億柱) 두 명을 충정(充定)하고, 모친 능에는 백성 김언기(金彦奇)와 손독필(孫禿弼) 두 명을 충정하여 각각 복호전(復戶田) 50복(卜)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이후 점차 해이해져서 단지 이금춘(李金春)과 박어둔(朴於屯) 두 명만이 남게 되었다. 1627년(인조 5) 군안(軍案)에 수호군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즉시 쇄출(刷出)하였고, 충정되지 않은 두 명은 본부(本府)로 하여금 역(役)이 없는 합당한 자를 찾아내 충정토록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으로 보아 양묘 수호 의지는 강했지만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기강이 해이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양묘 수호군의 역할은 양묘 수호, 금화, 금벌이었다고 한다.
1899년 삼척 준경묘·영경묘 수축(修築) 이후 양묘 수호를 위한 지침은 『수호절목』에 자세히 나온다. 양묘에 수호군 15명씩을 두어 제향(祭享), 금화(禁火), 벌초(伐草), 식목(植木) 등의 일을 수행하게 하였다. 조포사(造泡寺)는 흑악사(黑岳寺)로 하여금 두부를 비롯한 제물 준비 등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선 왕실 차원에서 조선 전기 이후 양묘에 대한 관심과 보호를 지속하면서 묘역 주변에 대한 화전 금지와 나무 보호도 지속하였다. 이로 인하여 준경묘와 영경묘 주변의 소나무는 우리나라 고유 수종인 육송[강송, 적송]으로 이루어진 소나무 숲[수림]으로, 어느 곳에서도 보기 어려운 원시 자연림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형태]
준경묘는 묘와 묘 앞에 재각(齋閣), 그 옆에 비각, 묘 앞의 좌우에 수라간과 수호군이 머물 공간, 홍살문, 홍살문에서 재각까지 이어진 신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영경묘는 묘가 안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영경묘로 오르는 별도의 공간에 재각, 그 옆에 비각, 묘 앞의 좌우에 수라간과 수호군이 머물 공간, 홍살문, 홍살문에서 재각까지 이어진 신도를 설치하였다. 현재 준경묘와 영경묘에는 수라간과 수호군이 머물 공간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대부분의 왕릉에는 재각으로 정자각이 세워져 있는데 준경묘와 영경묘에는 일자(一字) 형태의 정자각이 세워져 있다. 이와 같이 건립된 연유는 현장에 다녀온 신하들이 준경묘 아래가 진뻘이어서 정자각(丁字閣)을 세우기 곤란한데 수전(水田)과 같은 것은 풍수 보는 관리가 명당이라고 하였지만 묘 앞에서 진뻘까지의 거리는 몇 걸음도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사이에 정자각을 세운다면 불편하게 된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고종이 “그렇다면 ‘일(一)’자 모양의 재각을 간단하게 지어서 제사 지낼 때 넉넉히 행동하게 한다면 좋을 것이다. 동산의 무덤 자리는 지형이 어떤가?”라고 하니 이중하가 말하기를 “동산의 무덤 자리는 산 위에 정해져 있기 때문에 축대 아래에 정자각을 세울 만한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산 아래에 정자각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산 아래에 정자각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연유로 하여 다른 지역과 달리 삼척의 준경묘와 영경묘의 재각은 일자(一字) 형태를 띠게 되었다 한다.
[현황]
삼척 준경묘·영경묘 수호를 위한 재실(齋室)이 활기리에 있다. 현재 재실이 위치한 곳에 1899년 삼척 준경묘·영경묘를 수축하면서 재실을 지었는데 그 이전에 이미 이 지역 종인들이 비록 규모는 작지만 재사(齋舍)를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99년(광무 3) 준경묘와 영경묘를 수축하고 재실을 건립하였다. 재실은 매년 4월 20일 전주 이씨 문중에서 양묘(兩墓)에 제향을 봉행할 때 제수(祭需)를 준비하고, 종친들이 모여 회합을 가지는 장소이다. 내부에는 1899년(광무 3) 10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장례원(掌禮院) 소경(少卿) 이중하(李重夏)가 쓴 『준경영경양묘재실창건기(濬慶永慶兩墓齋室創建記)』가 전한다.
『준경영경양묘재실창건기』에는 전주에 단(壇)을 세우는 예식과 삼척의 묘를 수축하는 의례를 동시에 거행한 준경묘와 영경묘, 구거 유지를 정비하고 정자각과 비각을 세운 그동안의 사정을 정리하면서 재사(齋舍)가 완공되던 날에 곧 주나라 사람들이 훌륭한 말로 칭송하던 의미를 본받아 그 개요를 삼가 써서 재사 벽에다 걸어 둠으로써 나라 백성들이 모두 알게 하고, 고종 황제가 조상을 추모하고 융숭하게 보답하는 효성은 옛날보다도 빛나니 국맥(國脈)을 배양함에 거듭 무궁한 경사를 맞이하였음을 상기하며 기록하였다.
이와 함께 양묘를 수축할 때 미로면 내미로리에 있는 천은사[당시 흑악사]를 원찰로 하여 이곳을 조포사로 지정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로 볼 때 양묘와 함께 천은사도 중요하다.
삼척 준경묘·영경묘 제향과 관련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899년 삼척 준경묘·영경묘 수축 이후 왕실 차원에서 수호와 제향을 봉행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직 재산으로 관리되어 매년 제향을 봉행하였지만 광복 이후 매년 지내던 제향이 흐지부지되었다. 이에 숙담 종친이 주도하여 삼척과 인근 지역 종친 중심으로 매년 청명제사를 지내다가 1981년 준경묘·영경묘 봉향회가 설립되면서 봉향회가 주관하여 매년 삼척·강릉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이 중심이 되고, 서울과 경상도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온 종친들이 자발 참여를 하여 4월 20일 양묘에서 제향을 봉행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왕조를 탄생시킨 전주 이씨 가문의 정통성과 왕조 개창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중시한 지역은 전주 이씨 시조묘를 모신 전주, 용비어천가에 등장하는 목조이안사의 부모 묘인 준경묘와 영경묘가 있는 삼척시, 함경도 의주와 덕원 등 세 곳이다.
이 가운데 삼척 지역은 태조이성계 집안의 실묘로서는 가장 오래된 곳으로, 그 역사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또 이곳은 태조이성계의 선조들이 함경도 용주리에서 여진족의 벼슬을 지냈다는 사실을 들어 태조이성계를 여진족의 후예라 여기고 조선 왕조 또한 여진족이 지배한 국가였다고 주장하는 일부 일본 학자들의 여진족 500년설을 비판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증거를 보여 주고 있는 곳이다.
또한 조선은 개항을 전후하여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된다. 이에 조선 왕조는 이를 극복하여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고, 나아가 조선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하나로 삼척 준경묘·영경묘를 수축하였다. 즉 위치 논쟁으로 인하여 본격 수축을 미루어 온 목조 부모의 묘역에 대한 대정비가 전주의 조경단·경기전의 중수와 함께 고종 황제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은 개항 이후 조선 왕조의 유지와 국가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서 나름대로의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하여 국가 중흥의 계기로 삼으려는 고종 황제의 직접 의지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