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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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驛站 |
영어공식명칭 | Yeokcham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개항기 |
집필자 | 유병덕 |
[정의]
고려시대 세종 지역의 역로에 설치되어 통신·교통·숙박 기능을 담당하던 교통·통신 기관.
[개설]
역(驛)은 전근대 사회에서의 교통·통신 기관으로, ‘우역(郵驛)’이라고도 한다. 역에는 기본적으로 말[馬匹]과 역장(驛長)·역정(驛丁) 등 관리 인원을 두고 국가 명령 및 공문서 전달, 공무(公務)로 인한 여행자에 대한 필마(匹馬) 제공 및 숙식 알선을 담당하였다. 이외에도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를 비롯하여 지방에서 진상(進上)되는 공물(貢物)의 수송, 죄인 체포·압송,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 전달, 위급 시 군사 작전용 말의 징발 및 보급 등도 수행하였다.
[고려시대 역참제]
역참제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했지만 내용은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역참이 전국적인 규모로 설치된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와 지방제도가 대대적으로 정비되는 성종 무렵에 전국적 규모의 역참제가 실시되었다. 성종대 역참제는 중요도에 따라 도로를 대로(大路)·중로(中路)·소로(小路)로 나누고, 도로의 요소마다 역을 설치하였다. 대개 30리(里)마다 1개 역을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각 역의 크기에 따라 공수전(公須田)·관전(館田) 등 역전(驛田)을 차등 있게 지급하여 역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역리(驛吏)와 역정(驛丁)을 두어 관리를 맡겼다. 고려의 역로(驛路) 조직은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 참역조(站驛條)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참역조에 띠르면 전국적으로 22역도(驛道)에 525역이 설치되었다.
한편 역과 함께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와 사신들의 숙박을 돕는 시설로 원(院)이 운영되었다. 원은 역과 역 사이, 교통 중심지, 인적이 드물고 교통 사정이 나쁜 곳에 설치되어 여행자의 편의를 도왔다. 원도 역과 함께 삼국시대 이래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때는 원위전(院位田)을 지급하여 경비를 조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원은 주로 사찰과 연계하여 승려를 원주(院主)로 삼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절을 가리켜 ‘사원(寺院)’이라 부르는 것은 과거 절이 원을 겸하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세종 지역의 역참]
고려시대의 22역도 중 세종 지역과 관련된 역도는 ‘충청주도(忠淸州道)’이다. 충청주도에는 34개 역이 편재되어 있었다. 충청주도는 수원 동화역(同和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로, 관할 범위는 수원을 거쳐 진위-성환-천안-공주-부여에 이르는 역로와 평택-아산-신창-예산-홍성-해미에 이르는 역로, 양성-진천-청주-문의에 이어지는 역로이다. 현재 충청남도를 중심으로 경기도와 충청주도, 세종특별자치시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충청주도 34개 역 중 금사(金沙)역·포곡(蒲谷)역·김제(金蹄)역 등이 현재 세종 지역 관내에 설치된 역으로 추정된다. 금사역은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포곡역은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김제역은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사역과 김제역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환도로 재편된 뒤 1894년 전국의 역참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고려시대에 운영된 세종 지역의 원 관련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