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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룡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366
한자 伏龍戰鬪
영어공식명칭 Bokryong Battl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7년 11월 07일연표보기 - 복룡전투, 세종 지역인 충청남도 연기 복룡 일대에서 의병과 일본 경찰대가 교전
종결 시기/일시 1907년 11월 07일 - 복룡전투, 교전이 진행되고 일본군 연합 부대가 지원 나왔지만 의병은 행적을 감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11월 07일 - 복룡전투, 면장 임노현의 밀고로 일본 순사가 기습함
발생|시작 장소 복룡전투 - 세종특별자치시 어진동 일대지도보기
종결 장소 복룡전투 - 세종특별자치시 어진동 일대지도보기
성격 사건·사고와 사회운동
관련 인물/단체 임대수|권정남|임사일|바바|다카하시|마쓰이|임노현|후카미|요시미

[정의]

1907년 11월 7일 세종 지역인 연기 복룡 일대에서 의병과 일본 경찰대가 벌인 전투.

[역사적 배경]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에 분개하여 권정남(權正南)이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한솔동 지역인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담리 표석동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봉기하였다.

[경과]

임대수(林大洙)[1882~1911] 등 의병 30여 명이 조치원에서 파견된 일본군 수비대, 경찰대와 복룡(伏龍)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1907년 11월 7일 임대수 의진은 당시 연기군 남면 복룡[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의리에 편입된 남면 복룡리는 『여지도서』에 의하면 가구수가 15호로 기록되어 있다]에 집합하여 연기분파소 습격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병 활동을 면장 임노현(林魯賢)이 분파소에 밀고하였다.

연기분파소 순사 바바[馬場恒雄]와 다카하시[高橋公政]는 이 사실을 조치원역 수비대에 보고하는 동시에 곧바로 출발하여 오후 3시 30분경 의병 집결지인 복룡에 도착하였다. 이 마을은 산악이 동쪽에서 서쪽까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계곡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바는 동쪽 산 위로, 다카하시는 북쪽의 산으로 올라가 총격을 가했다.

불의의 총격을 받은 의병대도 이에 응전하였다. 약 40분이 지나 순사들은 탄약을 거의 소비하였다. 바바는 교전 중에 칼로 의병 2명을 죽이고 화승총 1정을 노획하여 연기로 돌아오는 도중에 보병대를 만났다. 탄약이 떨어진 다카하시도 연기로 돌아오는 도중에 연기에서 출동한 보병대를 만났다. 보병대는 보병 제47연대 제9중대 소속 마쓰이[松井常次郞] 소위가 인솔하는 병사 18명과 간호병 1명 외에 일본인 순사 3명과 한국인 순사 2명이 연합한 부대였다. 마쓰이 등 일본 보병대가 복룡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의병이 후퇴한 뒤였다.

[결과]

일본 경찰대는 주민들로부터 도주한 경로를 조사하여 연기 학천(鶴川)에서부터 공주 갈산(葛山), 두곡(杜谷), 입석(立石)으로 추적하였지만 공주 당곡(堂谷)에서 의병의 종적을 완전히 잃었다. 한편 특무조장 후카미[深水壯馬]가 이끄는 기병 10명도 순사 요시미[吉見淸次郞]를 수행하고 연기에서 우회하여 의병 집결지의 배후를 추적하였으나 역시 당곡에서 종적을 잃고 귀대하였다.

의병들이 주둔하고 있던 복룡은 임대수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며, 종적을 감춘 당곡은 바로 권정남 출신지이다. 따라서 이 전투를 수행한 의병은 임대수 의병과 연합하여 활동한 권정남·임사일(林士日) 의병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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