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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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重修一幸亭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37[세종로 1-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호걸 |
[정의]
1909년에 중수한 일행정의 기문을 새긴 현판.
[개설]
중수일행정기(重修一幸亭記)는 진세현(陳世顯)[1854~1928]이 무너진 일행정(一幸亭)을 다시 세우게 된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 진세현은 일행정을 처음 세운 진시책(陳時策)[1831~1906]의 아들이다. 호는 화잠(華岑)이다. 어려서부터 시부(詩賦)에 능하여 『화잠만집(華岑晩集)』, 『화잠소창(華岑消唱)』 등의 문집을 남겼다. 중수일행정기(重修一幸亭記)는 진병갑, 진병돈 형제가 보관하고 있다가 2006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진세현의 문집에서 대표적인 것은 반곡리를 중심으로 한 금강 중상류 지역의 자연과 인문 환경에 대하여 읊은 한시(漢詩) 「태양십이경(太陽十二景)」이다. 12경을 읊은 칠언율시 12수와 12경을 종합한 칠언율시 1수를 합쳐 총 13수가 있다. 시가 담고 있는 지역 경관 및 시적 기교 등에서 역사적 문학적 가치가 상당히 높은 작품이다.
진세현은 또 부모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다. 효행에 대한 기록이 1926년 연기군에서 편찬한 「공부자성적도속수오륜행실(孔夫子聖迹圖續修五倫行實)」에 전하고 있다.
[형태]
중수일행정기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평평한 직사각형의 판에 네 테두리를 결합하였다. 크기는 가로 57.5㎝, 세로 28.5㎝이다. 제목을 포함하여 28행 495자 모두 한자로 쓰여 있다.
흑칠 바탕에 글자를 음각으로 새긴 후 글자에 흰 칠을 하였다.
[내용]
편액에 새겨진 기문(記文)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부친[先君 處士公]이 일행정을 세운 때와 장소, ‘일행(一幸)’이란 이름이 학문에 힘쓸 것을 권유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 풍경의 아름다움을 비롯한 상세한 내용이 유고(遺稿)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 「일행정기」를 읽을 때마다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지 못한 마음[風樹之感]이 생김을 표현하고 있다.
둘째 일행정이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폐허가 되었고, 융희 기유(隆熙 己酉)[1909년] 5월에 제자들에 의하여 옛터에 모정(茅亭)[짚이나 새 등으로 지붕을 인 정자]이 다시 세워진 일을 기록하고 있다. 지붕을 덮고 기둥을 세우고 주춧돌을 놓고 흙벽을 바르는 과정을 거쳐 모정의 규모가 1칸에서 2칸으로 더 커졌음도 알리고 있다.
그리고 모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후학을 가르쳐 이끄는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중수일행정기 원문]
重修一幸亭記
往在癸酉端陽之朔 起一間草亭以家後東南隅咫尺之地 卽熊府之東華山之下鶯津之上也
我先君處士公以一幸二字揚名記述懸楣 惓惓於勸學後生之意 余常常敬讀倍增風樹之感 如在鯉趨?預之席矣
這間亭之興廢無常 學之作撤有時無乃 世運之盛衰 人事之得失 同歸於化翁之所使歟 鏡裏秋霜於焉六旬 自愧學淺識薄 而屈指居諸已四十餘年矣
隆熙己酉五月旣望 學徒爲其避暑課工營作茅亭二間於故址 其蓋屋也竪柱也定礎也塗墁也 翼?特侈於舊制 譬?缺月復圓
而滿天覆車更興 而着地己少去年 人之歎?獨爲看花
而等登亭而望 則北通趙氏之合江 西極林公之獨樂 南接申氏之翰林 或廢或興 孰優而孰劣
長夏酷炎披豁胸衿 不下於羾寒門濯淸風 而第一重大之責在於開導後學 則以余庸愚殆無異 僬僥之擧萬斤 駑蹇之致千里 自不覺惶汗而沾衣也
然試看亭之中廢而復興 則學之間斷而復續 可以如也 亭之前儉而後侈 則學之積小而成大 可以如也 聊以自慰 仍語學徒自勉之哉...使此亭永世勿替或曰請事斯語矣
嗚呼 先事追感罔極仍舊揚名繼以拙語 而若夫風景之美及幸不幸之所由 則詳載遺稿 玆不復贅焉
一幸吾亭卜日遷二間增廣舊基 全逸遊荒醉訓名義避暑勤工 是事緣擇勝蘇銘?幾日 醉翁歐述?多年 先君遺記追難忘 鐫掛新楣拙語?
仲夏二十日不肖子主事世顯謹識
[의의와 평가]
진세현은 일행정을 북쪽의 합강정(合江亭), 서쪽의 독락정(獨樂亭), 남쪽의 한림정(翰林亭)과 함께 거론한다. 세 정자는 반곡리 주변의 금강 유역에서 역사가 깊고, 관련된 인물도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곳이다. 합강정에는 조지겸(趙持謙)[1639~1685]의 「동춘당을 따라서 연기 합강정을 오르다(從同春堂(宋公浚吉號)登燕岐合江亭)」를 비롯하여 1600년대 문인들의 시가 전하여 오고 있다. 독락정은 임난수(林蘭秀)[1342~1407]의 아들 임목(林穆)[1371~1448]이 1430년에 건립하였으며, 한림정은 기묘사화(1519)에 연루된 신준미(申遵美)[1491~1562]가 건립하였다. 합강리에서 영곡리에 이르는 금강 유역에서 당시 반곡리 여양진씨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