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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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居昌愼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선빈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537년(중종 32) - 신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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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605년(선조 38) - 신재 사망 |
입향 시기/일시 | 1600년대 초 - 신재 전의현 입향 |
본관 | 거창신씨 본관 - 경상남도 거창군 |
입향지 | 거창신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
세거|집성지 | 거창신씨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석곡리 |
묘소|세장지 | 신재|신후윤|신이의 묘와 묘갈 -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 |
묘소|세장지 | 열녀 신이초 처 기계유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석곡리 |
성씨 시조 | 신수 |
입향 시조 | 신재 |
[정의]
신수를 시조로 하고 신재를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거창신씨는 양간공파의 신재가 1600년대 초에 전의현[현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관정리]에 입향하여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후손들은 전의면의 관정리·동교리, 전동면 석곡리 등에 살고 있다.
[연원]
거창신씨(居昌愼氏)의 시조 신수(愼修)[?~1101]는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 문종 때 사신으로 와서 고려에 귀화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7세손 신성(愼成)이 경상남도 거창군에 내려가 살면서 거창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입향 경위]
전의면 관정리 취촌에 세거해 온 거창신씨는 양간공파(襄簡公派)로, 입향조는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내고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 받은 신재(愼在)[1537~1605]이다. 신재의 친아버지는 신희복이고 양아버지는 신방좌(愼邦佐)이다. 연산군의 정비인 폐비 신씨는 할머니뻘 되는 6촌간이고 중종 정비[폐비] 단경왕후는 고모뻘 되는 7촌간이다.
중종반정으로 낙향한 신재의 조부 신수정(愼守正)[1474~1520]이 관정리의 인접 마을인 충청남도 천안시 성남면 대흥리[농골]에 정착하였다. 신재는 원래 신수정의 당질인 신희복의 친자인데 신수정의 아들인 신방좌의 양자로 가게 되었으며 1600년대 초 무렵에 선영(先塋)[조상의 무덤 또는 그 근처의 땅]이 있는 전의면 관정리 취촌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신재의 후손으로 군자감 주부를 지낸 신수호(愼秀毫), 승정원 좌승지를 지낸 신수준(愼秀埈), 호조참판을 지낸 신경윤(愼景尹),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신익흠(愼益欽), 사헌부 지평을 지낸 신후윤(愼後尹), 1691년(숙종 17)에 익위사로 세자시강원을 지낸 신이의(愼爾儀) 등이 있다
신재의 아들 대[신수호, 신수준, 신수웅] 이후에 전의면 관정리와 전동면 석곡리 일대로 분파하였다.
[현황]
거창신씨는 전의면 관정리·동교리와 전동면 석곡리 등에 살고 있다. 특히 전동면 석곡리에는 거창신씨가 석곡리 주민의 절반 가까이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전의면 관정리에는 입향조 신재를 비롯한 신후윤과 신이의의 묘와 묘갈(墓碣)[머리 부분을 둥글게 다듬어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이 있다. 전동면 석곡리에는 기계유씨의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있다. 열녀 기계유씨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