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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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州李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임선빈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527년(중종 22) - 이응방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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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763년(영조 39) - 이광복 출생 |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599년(선조 32) - 이응방 사망 |
본관 | 경주이씨 본관 - 경상북도 경주시 |
입향지 | 경주이씨 입향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 |장군면 평기리|부강면 문곡리|소정면 고등리|조치원읍 신흥리 |
세거|집성지 | 경주이씨 세거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봉암리 |장군면 평기리|부강면 문곡리|소정면 고등리|조치원읍 신흥리 |
묘소|세장지 | 이광흥 효자각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문곡리 |
성씨 시조 | 이알평 |
입향 시조 | 이응방|이장준|이광복|이영필|이집상 |
[정의]
이알평을 시조로 하고 이거명을 중시조로 하며 이응방, 이장준, 이광복, 이영필, 이집상 등을 각각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세종특별자치시의 경주이씨는 국당공파와 석탄공파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입향하였다. 주로 연서면 봉암리, 장군면 평기리, 부강면 문곡리, 소정면 고등리, 조치원읍 등지에 세거하였다.
[연원]
경주이씨 시조는 신라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사로(斯盧) 6촌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으로 전해지는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이며, 중시조는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찬한 이제현 묘지문(墓地文)에 신라 후기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거명 이후의 세계(世系)[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가 기록되어 있어 이거명을 1세로 기세(起世)[시조 이후 끊긴 가문을 다시 일으킴]하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에 세거한 경주이씨는 주로 17세에서 분파한 국당공파와 19세에서 분파한 석탄공파 후손들이다.
[입향 경위]
경주이씨 국당공파는 이천(李蒨)[1274~1349]이 파조이다. 이천은 1299년(충렬왕 25) 국자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충숙왕 때 우사보(右思補)를 지냈다. 1344년(충혜왕 복위5) 지공거를 지내고, 첨의평리상의(僉議評理商議)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5년(충목왕 1) 첨의참리(僉議參理)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 검교정승이 되었으며,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고, 국당(菊堂)은 호다. 연서면 봉암리, 장군면 평기리, 부강면 문곡리 등지에 세거한 경주이씨들이 국당공파다.
연서면 봉암리의 경주이씨 입향조는 이광복(李光復)[1763~?]이다. 아버지는 이택간(李宅幹)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장군면 평기리 경주이씨는 초려 이유태의 후손으로, 입향 유래는 이유태의 고손(高孫)[증손의 아들]인 이장준에서 비롯된다. 이장준이 죽은 후 어려운 집안 살림으로 묘를 쓸 상황이 아니었는데 일찍이 이유태에게 수학한 진주류씨 문중에서 이를 보고 묏자리를 내주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장지는 현재 장군면 평기리이다. 장군면에 묘를 쓴 후 경주이씨 가문은 번창하게 되었고, 이후 서울에 있던 이유태의 조부·증조부·고조부의 묘소까지 이장하여 관리되고 있다.
부강면 문곡리 경주이씨는 국당공[정순공]파이다. 정순(靖順)은 이성중(李誠中)[1330~1411]의 시호이며, 이성중은 이천의 사남이다. 이성중은 1347년(충목왕 3)에 등과하여 고려 후기 여러 관직을 거친 후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1396년(태조 5) 축성도감제조로 있을 때 축성한 성이 견고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하옥되기도 하였으나 그 뒤 정헌대부에 오르고,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를 거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에 이르렀다.
문곡리의 경주이씨 입향조는 24세손 이응방(李應邦)[1527~1599]이다. 입향 유래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배위(配位)[남편과 아내가 모두 죽었을 때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가 청주한씨 한일선(韓日善)의 딸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처향(妻鄕)[아내의 관향] 입향으로 추측된다. 한편 이응방 묘비문은 이유태가 썼다. 이응방은 이유태의 종조부(從祖父)이다. 이응방의 손자 이유선은 태안군수를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진군하기도 하였다. 현재 후손 집에는 선조들이 공부하던 자료와 구보·신보 등 옛 문헌이 많이 소장되어 있으며, 입향조가 살았다는 집터의 옛 사진도 있다.
석탄공파는 이존오(李存吾)[1341~1371]가 파조이다. 이존오는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 수원서기(水原書記)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1366년 우정언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그 뒤 공주의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울분 속에 지내다가 죽었다. 석탄은 이존오의 호로도 사용되었다.
소정면 고등리 경주이씨 석탄공파의 입향조는 이영필(李永弼)이다. 200여 년 전 충청북도 오창에서 이거(移居)하였다고 하는데 입향 사유는 자세하지 않다. 조치원 신흥3리에 거주하는 경주이씨 석탄공파는 150여 년 전에 이집상(李集祥)이 연산[현 논산시 연산면 일대]으로부터 이거해 왔지만 입향 사유는 자세하지 않다. 후손의 전언에 의하면 이집상이 처음 연산으로 들어왔을 때 마을에는 5가구 정도가 살고 있었으며, 그 후 경주이씨 문중이 커지면서 신흥리를 대표하는 성씨가 되어 한국전쟁 전후에는 40가구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1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관련 유적]
종촌동에 이유태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으며, 부강면 문곡리에 경주이씨 국당공의 15세 후손인 이광흥(李光興)의 효자각(孝子閣)이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61호로 지정되어 있다.